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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상과 의지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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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상과 의지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k지니 2021. 6. 29. 06:39

개체는 스스로의 생존만을 위해 분투하는데 이 과정에서 개체 간의 갈등과 다툼이 반복된다. 그리고 개체의 생존본능이 곧 의지의 발현이라고 한다면 개체 간의 다툼 자체는 의지가 본질적인 자기 자신과의 분열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의지는 자기 보존적임과 동시에 자기 파괴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맹목적인 개체의 생성과 소멸은 영원히 계속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이러한 맹목적 운동으로 인한 비극의 반복을 그리스 신화의 익시온과 다나이덴 자매, 그리고 탄탈로스에 비유하였다. 익시온은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초대를 받아 간 자리에서 제우스의 부인인 헤라를 탐낸 죄로 제우스에 의해 영원히 도는 바퀴에 묶이는 벌을 받은 사람이다. 다나이덴 자매는 아르고스의 왕 다나오스의 딸들로 결혼 후 첫날밤에 남편을 살해하였다. 그래서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벌을 받게 되었다. 탄탈로스는 신들의 초대로 올림포스에 갔다가 불로불사로 만들어주는 암브로시아를 훔치려 했다. 그것이 신에게 들켜서 영원히 갈증을 느끼고, 배고픔을 느끼는 벌을 받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맹목적 운동의 의지를 "의욕의 주체는 익시온의 돌아가는 바퀴에 계속 묶여 있는 것과 같고, 다나이덴 자매가 밑 빠진 독에 끊임없이 체로 물을 퍼 올리는 것과 같으며, 영원히 애타게 갈망하는 탄탈로스와 같다"라고 표현하였다.

쇼펜하우어의 의지 형이상학은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삶의 현실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하나의 형이상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의지가 의욕하는 것은 이 세계, 즉 있는 그대로의 삶과 다르지 않으며, 삶이란 의지의 의욕이 나타난 것에 불과하고 의지가 의욕하는 것은 언제나 삶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의지는 곧 삶에의 의지(Wille zum Leben)라 말할 수 있다. 삶에의 의지는 동식물의 자연계에서의 생존 투쟁으로 드러나며 인간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으로 본 우리의 삶은 의지에 종속된 삶이며, 의지는 맹목적이므로 삶은 끊임없는 갈등과 고통의 연속으로 나타난다.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이 가리키는 삶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으로 인해 그의 철학은 염세주의(Pessimismus)로 간주된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세계는 맹목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의지의 세계이므로 선하다가 보다는 악한 세계로 드러난다. 또한 어떠한 이상적인 목적이 전제되지 않는 세계관으로 인해 세계의 흐름을 갈등과 부조리의 반복으로 목도할 수밖에 없고, 고통으로의 삶에 인간을 내맡길 수밖에 없다. 쇼펜하우어에게 이러한 염세주의는 의지의 맹목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원리의 필연적인 귀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단지 세계의 무조건적인 부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적절치 않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세계에 대한 절망만큼이나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절실하게 모색한다는 점에서, 단지 삶의 부정에만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염세주의적 세계관은 쇼펜하우어로 하여금 갈등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삶의 길을 찾도록 종용하고 이를 형이상학의 궁극적 과제로 삼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쇼펜하우어는 의지로부터 벗어나는 대안적인 삶의 모색으로서 예술론과 윤리론을 정초한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삶에 대한 무조건적 부정과 고통의 방관이 아닌, 고통을 인정하되 넘어서려는 적극성과 삶을 긍정하려는 절박함의 태도를 지닌다는 면에서 비관자보다는 구도자의 염세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표상과 의지로 파악하는데, 이는 현상과 물 자체를 구분하는 칸트의 입장과 그 맥을 같이한다. 즉 표상은 현상에, 의지는 물 자체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는 곧 물 자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입장이다. "표상으로 나타나는 그 자신의 현상의 본질 자체는 그의 의식의 가장 직접적인 것을 형성하는 그의 의지다" 또는 "모든 객관은 현상이다. 하지만 의지만이 물 자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표상과 의지의 관계에 대해서는 칸트와 다른 입장을 가진다. 칸트에게 있어 물 자체는 현상과 직접적으로 혹은 일대일로 대응되는 관계가 아니며 또한 주관의 선험적 인식 형식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물 자체는 인식 가능성에 있어서도 닫혀있다. 즉 칸트에게 있어서 현상과 물 자체는 인식론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은 데 반해, 쇼펜하우어는 표상 세계를 의지가 객관화된 현상으로서 둘 간의 관계성을 설명하며 나아가 의지의 인식에 있어서도 그 가능성을 열어 둔다. 다시 말해 칸트에게서 주관은 세계를 현상으로서 인식할 수 있을 뿐, 결코 물 자체를 알 수 없으며 현상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쇼펜하우어는 신체라는 매개를 통해 의지의 존재를 상정하고 우리가 표상하는 세계는 의지가 객관화된 세계라고 말하며 의지와 표상의 관계를 설명한다. 쇼펜하우어에게 표상 세계는 의지가 객관화된 세계이며, 의지의 지배를 받는 세계이다. 하지만 두 세계를 단순히 원인과 결과의 인과법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의 인과율 자체가 주관이 세계를 인식하는 선험적 조건으로서, 즉 주관에 의해 근거 지워진 표상의 세계에 적용되는 근거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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