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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의지와 객관화 본문
표상 세계는 의지가 객관화된 것이기는 하지만 의지가 존재하는 방식은 표상 세계와는 전혀 무관하다. 의지는 표상 세계의 존재 방식인 충분 근거율, 즉 시간과 공간, 인과율의 법칙을 벗어나 있다. 의지의 세계에는 시간적 선후도, 공간적 위치도, 인과에 의한 생성과 변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표상은 다수성과 개체의 세계인데 반해, 의지는 단일한 하나의 세계다. 표상과 의지의 세계는 객관화라는 방식으로 연관되어 있지만 두 세계는 전혀 다르다는 견해는 일견 모순돼 보인다. 이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물 자체로서의 의지는 그 의지의 현상과는 전적으로 다르고, 그 현상의 모든 형식으로부터는 완전히 자유롭다. 사실 의지가 나타나면서 비로소 그 의지가 현상 형식 속으로 들어가므로, 그 현상 형식은 의지의 객관성에 관계할 뿐 의지 자체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설명하였다. 덧붙여서 그는 "모든 현상 중 가장 보편적 형상인 주관에 대한 객관의 형상도 이미 의지와는 무관하다. 알다시피 시간과 공간도 포함하는 근거율 속에 다 함께 공통된 표현을 하는 이 가장 보편적인 형식에 종속되는 여러 형식은 더욱 의지와는 무관하다. 따라서 이 형식을 통해서만 존재하고 가능하게 된 다수성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하였는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의지의 현상은 무수히 많지만, 물 자체로서의 의지는 더구나 모든 다수성으로부터 벗어난다. 의지 자체는 하나다. 그렇지만 하나라고 하는 것은, 어떤 객관이 하나라고 하는 경우 그 단일성이 단지 가능한 다수성의 반대로 인식되는 하나가 아니고, 또한 추상을 통해서만 다수성에 의해 생긴 하나라는 개념도 아니다. 의지는 객관화의 원리인 시간과 공간의 밖에 즉, 다수성의 가능성밖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하나이다."라며 설명했다.
표상 세계는 의지가 객관화되어 드러나지만 의지가 존재하는 원리는 표상 세계와 전혀 다르고 무관하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이해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난점을 앞서 말한 대로 개념에 의한 이해의 한계로 지적하며 근거율을 벗어난 이해를 요청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표상 세계를 경험하는 근거율에 의해서는 의지 자체를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서 의지와 표상의 관계를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면, 표상 세계는 주관에 의해 인식된 세계이며 충분 근거율의 형식으로 조건 지어진 세계이다. 즉 표상 세계는 시간, 공간, 인과율에 의해서 표상되는 개체들의 "병렬과 순차의 다수성과 인과율에 의한 변화와 지속"이라는 형식으로 인식된다. 그에 비해 의지는 시간, 공간, 인과율의 조건을 벗어나 이들 형식에 의해 설명될 수 없는, 즉 개체의 다수, 변화와 생성의 현상 이전의 존재인 물 자체의 세계다. 이 두 세계는 서로 무관한 형식이지만, 표상의 세계는 의지가 객관화된 현상으로서 단일한 의지가 다양한 개체들로 드러난다는 관계를 통해 의지와 표상 세계는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지의 객관화를 단일한 의지가 개체의 다수성으로 분화하여 존재한다는 방식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쇼펜하우어는 현상의 다수성, 즉 온갖 형태를 지닌 수많은 개체가 의지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며 이 다수성은 의지 그 자체가 결코 그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는, 시공간이라는 개체로서의 주관의 인식 형식에 의해 조건 지어진 다수성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의지는 사물의 다수성에도 불구하고 분할할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며 개체의 다수성 자체는 의지가 아닌 의지의 현상과 관계할 뿐이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단일한 의지가 우리에게 다양한 개체들로 객관화하는 데 있어 단계가 있다고 말한다. 즉 의지가 객관화되어 드러나는 데 있어 개체 또는 종(種)에 따라 가시성(Sichtbarkeit)과 판명성(Deutlichkeit)의 정도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자연력(Naturkraft)으로 나타나는 힘들은 의지의 가장 낮은 객관화 단계이며, 식물과 동물의 생명력에서 더 높은, 그리고 인간에 이르러서는 가장 높은 단계의 객관화가 나타난다. 쇼펜하우어는 객관화 단계가 높을수록 개체는 스스로의 개성을 분명하게 가시적으로 드러내는데, 따라서 하등동물로 내려갈수록 개체의 개별적 성격보다는 종의 일반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높은 객관화 단계인 인간에게 있어서는 종으로서보다는 개인적 성격의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그로 인해 개체 간의 상이함도 크게 존재한다. 거꾸로 보자면 인간과 거리가 먼 동물일수록 개별적 특성의 흔적은 사라지고 식물과 무기물에서는 개체의 고유성은 완전히 사라지며 오로지 같은 종의 개체들은 외적인 우연성에 의해 초래되는 차이밖에 가지지 못한다. 즉, 의지의 객관화가 높은 단계로 갈수록 개체화의 원리가 분명하고 가시적으로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