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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와 플라톤의 이념적 차이 본문
칸트와 플라톤의 이념은 인간의 감각이 수용한 경험을 넘어선다는 면에서는 동일하지만, 플라톤의 이데아가 주관 밖에 존재하는 보편자임에 반해 칸트의 이념은 인간의 주관 안에서, 즉 이성에 의해 얻어지는 보편적 개념으로 상정된다는 면에서 다르다. 그렇지만 칸트는 그러한 주관의 선험적 보편으로서의 이성 이념에 대해서도 플라톤의 이데아로부터 근거하고자 한다. 이와 관련한 칸트의 언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의 생각에 따르면, 이념들은 최고 이성으로부터 유출하여, 그로부터 인간의 이성에 분유되었다. 그러나 인간 이성은 이제 더 이상 그 원초적인 상태에 있지 않아, 지금은 매우 모호해진 옛 이념들을 상기를 통해 되불러내야만 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칸트는 플라톤이 언급한 이데아와 이성 간의 관계, 즉 최고 이성으로부터 인간 이성에게 분유된 것으로서의 이데아, 그리고 이성에 의해 다시 불러일으켜지는 이데아의 상기설로부터 자신의 이념 개념을 설명한다. 여기서 칸트가 언급한 '최고 이성'은 플라톤의 말하는 "자족적이며 가장 완전한 신"을 해석한 용어라고 볼 수 있으며, 최고 이성의 이념이 인간 이성으로의 분유된다는 언급은 칸트가 덧붙인 설명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어 배움을 통해 알게 되는 진리는 불멸의 영혼이 보았던 신들의 실재(참의) 세계에서의 형상(이데아)을 지상의 세계에서 다시 상기함을 통해 알게 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이데아의 상기는 탐구와 지식을 통해 어렵게 달성된다는 점 또한 강조한다. 이러한 플라톤의 이데아 상기설을 칸트는 오성의 인식능력을 넘어서 개념의 계열을 완성하는 이성의 이념의 초월성과 연결 짓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칸트가 이성 이념의 보편성과 선험성의 근거를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에서 찾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칸트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이성의 선험적 인식의 관점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선험철학의 체계 내로 포함하고자 한다. 칸트는 플라톤의 해석에 앞서, 플라톤이 자신의 이론을 피력할 때 개념을 충분히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때때로 자기 자신의 의도와 어긋나게 말하고, 또는 생각하기도 한다는 점을 들면서 자신의 해석이 플라톤의 의도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점을 부연한다. 이렇듯 칸트는 플라톤의 의도를 유추하면서 이데아와 이성의 선험적 이념을 연관 짓고자 하였으나, 플라톤과 칸트의 이념은 그것의 존재론적 역할 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즉 주관을 넘어선 보편자로 존재하는 진리를 상정하고자 했던 플라톤과 달리 칸트는 주관이 인식하는 선험적 원리에서 보편성을 찾고자 하였으며 이성의 이념은 그러한 요청에 부응하는 개념이다. 즉 경험을 초월하고자 하는 사유의 출발점은 같지만 주관을 경계로 하여 전혀 다른 종착점을 가진다는 면에서 두 개념은 구분된다.
이와 관련하여 브로드(Broad)는 이념이라는 용어가 칸트의 선험철학 체계 내에서 가지는 전문적인 의미를 이해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에 의하면 이념이란 오성이 통합하는 개념의 무한한 계열을 종결된 것 또는 완결된 것으로 이성이 생각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로서, 이성에 의해 요청된 최종적 항이나 완결된 전체의 개념을 의미한다. 또한 카울바흐(Kaulbach)는, 칸트의 이념이 자연을 현실화시킨 최고의 보편자로서 신을 중심으로 하는 이전의 초월 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데 원리가 되는 개념으로서, 개별자를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인 개념을 주관 안에서 찾은, 경험적 표상이 섞여 있지 않은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서정욱은 칸트가 플라톤의 이데아를 자신의 철학에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자신의 개념인 이념으로 바꾸어 설명하려 한 점을 지적한다. 즉 칸트에게 이념은 이성의 추리를 통해 경험에서 이끌어낸 무제약자의 개념이고 그에 비해 플라톤의 이데아는 경험 중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데아를 인식 능력 안에서 설명하려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데아는 경험으로부터 연역하지 않은, 그리고 이성에 의해 추론된 개념이 아니라는 의미가 중요하다.
이처럼 칸트의 이념과 플라톤의 이데아는 용어를 공유하지만 그 형이상학적 의미는 차이를 갖는다. 쇼펜하우어 또한 이러한 점을 지적하면서 칸트의 이념에 대해서는 비판적 논지를 드러낸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칸트의 이념은 추론을 오성의 범주에 적용함으로 생겨나는 이성에 의해 행해진 작업의 결과이다. 그에 반해 플라톤의 이데아는 주관의 인식 너머의 진리의 세계로서 영혼이 이미 보았지만 잊어버리고 있던 불변의 진리를 다시 직관적으로 상기하는 형상이다.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서 칸트의 이념과 플라톤의 이데아는 추론과 직관이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에 의해 파악되는 인식론적 차이를 갖는다.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언급하며 칸트의 이념을 비판하였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그가 선택한 단어가 사실 그토록 확실하게 나타내듯이 전적으로 직관적이지만, 우리는 그 단어를 직관적이거나 가시적인 사물들에 의해서만 그에 상응하게 번역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칸트는 직관의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추상적인 사고조차 그것의 반쯤밖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을 나타내기 위해 그 단어를 가로챘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