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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진정제로서의 예술 본문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삶은 곧 고통이다. 이러한 염세주의적 세계관에서 쇼펜하우어는 예술이 철학과 마찬가지로 삶의 가장 깊은 문제인 고통과 관계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미적 관조는 의지의 지배에서 벗어난 의식의 상태를 열어주고 그로 인해 삶의 투쟁 한가운데에서 겪는 주관의 고통을 객관으로 관조할 수 있게 함으로써 고통을 진정시키는 순간을 맞는다. 이러한 고통의 진정으로서 예술이 가진 힘을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진정제(ein Quietiv alles Wollens)'라고 부르며 예술의 역할을 강조한다. '의지의 진정제'라는 용어는 의지 부정의 소극적인 표현으로 형이상학적 원리로써는 같은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4권에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궁극적인 삶의 방식으로서 금욕과 연민의 윤리를 제안하는데, 금욕의 윤리에 의한 의지 부정을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의지 부정으로서, 예술에 의한 의지 부정은 소극적이고 일시적인 의지 부정이라는 의미에서 의지의 진정제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비극을 통한 의지의 진정을 말하면서, 이것에 이르게 되는 인식의 원리를 설명한다. 그는 "개개인에게 (의지에 대한) 이 인식이 고뇌 자체를 통해 정화되고 승화되어, 이제 마야의 베일인 현상에 의해 인식이 더 이상 기만되지 않고, 개체화의 원리인 현상의 형식이 인식으로 간파되고, 이 원리에 근거하는 이기심이 바로 그로써 사멸하게 되는 경지에 도달한다. 그렇게 되면 이젠 이때까지 그토록 강력했던 동기들은 힘을 잃고, 대신 세계의 본질에 대한 완전한 인식이 의지의 진정으로 작용하여 체념을 초래하는데, 이는 삶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모든 의지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라고 원리를 설명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의지가 진정된 상태는 예술 속의 주관이 개체로서의 의욕을 포기하는 체념에 의해 달성되는 미적 관조의 상태이다. 즉 주관이 스스로를 의지로써 인식하는 자기 인식에 도달할 때, 개체의 무상함에 대한 자각과 함께 의욕은 포기되고 맹목적인 의지의 분출은 진정되며, 결국 자신의 고통을 체념하고 관조함으로써 진정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개체로서의 의욕이 체념된 순수 주관을 통해 바라본 삶에서는 "행복이나 불행은 사라져 버리고", "강력한 왕의 눈이든 고통에 시달리는 거지의 눈이든 매한가지가 된다. 이 모든 고통은 그것이 어느 누구의 무엇에 의한 것이든 모두 동일한 의지의 발현이라는 삶의 본질에 대한 인식에서 오는 체념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념은 단지 삶 자체의 거부나 삶을 포기하는 좌절에서 비롯된 수동적인 패배 의식과는 다른, 세계와 삶의 본질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의미에서 능동적인 수용의 태도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비극성에 대한 수용을 통해 개체의 의욕으로서의 의지는 체념되고 의지가 휴식하는 진정의 순간을 체험하게 된다. 예술은 이렇듯 형이상학적 사유를 동반함으로써 의욕 하는 자기에서 벗어나 고도의 정신적 고양의 계기를 맞는다. 결국 쇼펜하우어에게 예술이란 형이상학적 인식의 계기이며, 고통으로부터의 진정된 순간이다. 이것은 예술가인 동시에 형이상학자로서 겪게 되는 체험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쇼펜하우어는 예술을 통한 의지의 진정의 의미를 형이상학적 '구원(Erlosung)'이라는 단어에 빗대어 설명되기도 한다. 예술은 모든 의욕의 진정이 되었는데, 이것을 기독교나 인도 철학의 가장 심오한 정신인 완전한 체념, 모든 의욕의 포기, 뒤돌아보기, 의지의 폐기 등이 생겨났다고 하였다. 그중 세계 전체의 본질의 폐기인 '구원'이 생겨났다고 하였다.
쇼펜하우어는 예술을 종교에 빗대어 표현할 정도로 삶에서 예술이 가진 역할의 의미를 확장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가 말한 의지의 진정제로서의 예술은 그 한계를 가지는데, 그것은 이러한 순수주관의 미적 관조의 상태가 지속적으로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술을 통한 의지의 진정을 말할 때 '구원의 순간'이라는 표현을 부각시킨다. 즉 개체를 벗어난 순수인식주관의 상태는 주관이 예술 속에 있을 때, 예술이 드러내는 이념을 관조할 때 순간적으로 개현하는 무아(無我)의 체험으로써, 우리는 미적 관조를 떠나면 언제라도 충분 근거율의 표상 세계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지의 진정으로서 예술의 역할이란 순간에만 머무는 신기루와도 같다는 의미에서 '순간의 구원'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의 예술 개념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한계는 항상 지적되고 있는 부분이다. 예술은 "고통으로부터 지친 삶을 일시적으로 위로할 뿐, 예술이 주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일시인 것"이며, "영원한 행복을 약속하지 못하며, 금욕의 과정을 통해 완전히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는 해탈의 경지까지 이르게 하지도 못한다." 쇼펜하우어는 예술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예술가)에게 그런 인식(미적 관조)은 그를 영원히 구제하지 않으며, 삶으로부터 한순간만 구제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아직 삶으로부터 벗어난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삶에서 위로받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예술에 의한 영원한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예술의 유희를 벗어나 해탈한 성자에게서 볼 수 있는 진지성으로 넘어가야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제안으로 금욕과 연민의 윤리학을 주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