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17,484명 읽음

경험적 숭고는 차이가 있을까? 본문

카테고리 없음

경험적 숭고는 차이가 있을까?

k지니 2021. 7. 14. 13:04

숭고에 대한 의견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중 숭고를 경험함으로써 고양되는 주관 개념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쇼펜하우어가 숭고 경험을 통한 주관의 정신적 고양을 순수한 미적 관조의 영역에 한정하고 칸트가 강조하는 도덕성의 가치를 배제하였다는 것은 숭고를 통해 달성되는 정신적 고양의 지향점이 전혀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숭고의 경험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인식의 지평이 형이상학적으로도, 또한 가치론적으로도 전혀 다르다. 공병혜는 숭고미에 관한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차이를 이러한 점에서 정의하는데, 칸트의 숭고미를 "도덕적 주체자가 자신의 내면의 도덕적 이념을 일깨워서 일어나는 정신적 감정"으로, 쇼펜하우어의 숭고미를 "표상의 세계에서 개별자가 의지의 싸움을 거쳐 세계의 본질을 직관하는 순수 인식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자기 고양의 감정"으로 설명한다. 반데나빌레(Vandenabeele) 또한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칸트가 숭고를 통해 드러내려고 했던 이성의 이념이나 소명에 대한 존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면에서 미적 주관의 차이점을 언급한다. 또한 그는 주관의 상태에 대해서도, 칸트의 완전한 도덕성에 이른 안정된 주관의 인식상태와는 다르게 쇼펜하우어의 숭고적 주관은 의지를 넘어가려는 투쟁 과정의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적한다. 즉 숭고를 경험하는 주관은 자연의 대상에 의해 위협받고 방해받는 주관과 미적 관조의 평온한 주관의 상태 사이의 투쟁 과정에서 규명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인식 상태의 변화과정 중에 놓여있는 주관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쇼펜하우어의 숭고론은 이성과 도덕의 인식 영역이 아닌 순수한 미적 체험으로서 지위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칸트 미학과는 구분되는 숭고의 미학적 의의를 가진다.

쇼펜하우어와 칸트의 숭고미에는 서로 차이가 있다. 그들의 의견은 숭고와 예술의 관계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칸트는 미적 대상으로 주로 자연을 거론하였는데 특히 숭고에 있어서는 그 형식적 특성이 몰형식성과 무한정성에 있음으로 인해 예술보다는 자연을 대상으로 무한한 크기와 압도적인 위력과 함께 논의하였다. 특히 상상력과 오성의 한계와 무능으로 인해 현시할 수 없는 대상을 무한의 이성 이념을 수반함으로써 만족에 이르는 '부정적 현시'로서 전개되는 칸트의 숭고는, 무제약자의 이념을 자극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측면에서 자연미에 대해서만 주로 숭고를 찾았으며 예술작품, 특히 문학이나 음악 등의 무형 예술에 대해서는 숭고와 관련하여 다루지 않았다. 칸트에게서 숭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거론되는 자연의 무한한 크기와 압도적인 위력은 상상력과 오성의 인식능력의 한계를 초월하는 무한한 형식으로서, 감성적인 형식으로는 현시될 수 없는 몰형식적 표상이다. 이러한 현시될 수 없는 몰형식적 표상은 이성에 의한 무제약자의 이념을 통해 비로소 합목적적으로 사유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마치 감성적으로 현시한 것처럼 오성과의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됨으로써 숭고의 감정으로 체험될 수 있다. 이렇듯 상상력과 오성의 한계에서 오는 감성적인 현시의 불가능성이 이성에 의해 비로소 현시될 수 있음을 '부정적 현시'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칸트 이후에는 몰형식성과 무한정성으로서의 숭고가 예술에서 재현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을 불러올 만큼 칸트 미학에서 숭고는 예술과는 거리가 먼 개념으로 취급된다. 칸트 미학에서 말하는 숭고가 예술에서 드러날 수 있는지, 예술작품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숭고를 인간 행위와 삶에 적극적으로 연관시키면서 비극과 같은 예술 형식으로 숭고의 재현을 설명한다. 반데나빌레(Vandenabeele)는 쇼펜하우어와 칸트의 숭고론을 비교하면서 가장 궁극적인 차이로서 숭고 경험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능력과 극복의 대상을 거론한다. 반데나빌레(Vandenabeele)는 쇼펜하우어의 숭고론이 칸트보다 더욱 타당한 관점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네 가지 측면에서 다룬다. 첫째, 쇼펜하우어의 미학은 주관중심의 칸트에 비해 좀 더 분명하게 객관을 지향하며, 숭고의 체험과 관련한 특성에 좀 더 주목함으로써 숭고 체험의 가능성을 보충한다. 둘째, 쇼펜하우어의 접근은 숭고의 윤리적 개념화를 지양하고 경험으로서의 순수한 미적 특성에 집중한다. 셋째, 쇼펜하우어는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취약한 신체와 관련한 체험으로서 숭고의 좀 더 타당한 심리학적 논의를 제공한다. 넷째, 쇼펜하우어의 숭고 개념은 우리가 왜 숭고한 대상이나 경험을 두려워하거나 공포스러워하지 않고 즐기고 찾는지에 대한 타당한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숭고의 이율배반(paradox)에 관한 좀 더 적절한 해결점을 제시한다. 그는 칸트의 숭고는 "인간의 자연의 광대함을 견뎌내는, 그것에 맞서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의 존재를 확신하고 이성적 자유에 대한 수용성을 재확인하는 인간의 능력"을 드러내는데 반해, 쇼펜하우어의 숭고는 "우선적으로 미적 체험으로서 칸트가 제안한 것과 같은 인간 중심적 사유와 거리가 있으며, 일반적인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숭고의 체험은 단지 개체성뿐만이 아닌 이성의 합리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세계의 본질을 향한 형이상학적 인식이다. 결국 숭고의 체험은 우리에게 세상의 혼돈 한가운데에서 불안의 감정으로부터 떠나 존재의 단일성과 의미를 조망하고 평화와 고요를 찾는 계기를 마련해줄 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쇼펜하우어의 숭고론에서 우리는 실존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