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84명 읽음
독특한 쇼펜하우어의 예술 미학 본문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은 예술을 그 자체로 철학하는 행위로 본다면 면에서 이전의 미학과는 다른 독특한 관점을 갖는데 이를 세 가지 측면에서 논의해 볼 수 있겠다. 첫째는 예술을 개별 주관의 감상과 표현의 기술이 아닌 현상의 세계를 넘어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로 본다는 점이다.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에서 이러한 면의 중심이 되는 개념은 '이념'이다. 변화하는 표상 세계 너머 불변의 진리를 담지하는 객관이 이념이라면, 예술을 이념에 대한 미적 관조와 재현으로 정의하는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에서 예술은 곧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와 동일시된다. 쇼펜하우어가 이념을 조망하는 예술가를 천재에 한정지은 것도, 예술행위가 단순한 숙련과 학습에 의해 달성되는 기술 이상의 지평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이와 관련하여 셰어(Scheer)는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이 "‘존재자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형이상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대답을 수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이전의 미학과는 다른 의의를 제기한다. 즉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은 미의 경험적 속성으로서의 취미 혹은 인식의 합리성에 근거하여 미적 판단을 설명하려는 인식론적 관점의 이전의 미학과는 달리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질의 세계에 접근하는 계기로서 미적 경험을 다룬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쇼펜하우어의 미학으로 인해, "미와 예술이 인식론과 긴밀하게 결부되었던 시대에 종말을 고했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또한 윤동주는 형이상학적 예술로서 음악을 논하면서 예술을 하는 행위를 세계와 자연과 생의 본질을 통찰하는 형이상학 학습, 다시 말해 존재 이해를 수행함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나아가 예술은 존재의 자기 개시이며, "존재는 인간을 도구 삼아 자신을 음악으로서 개시하고 음악은 존재로부터 생명력을 길어내어 자신을 형성해간다"고 언급하며 예술을 진리로서의 존재가 개현 하는 틈으로 제시한다. 요컨대, 쇼펜하우어로 인해 예술은 단지 미적 인식의 원리의 문제가 아닌 존재와 본질의 세계로 진입하여 진리의 삶을 실현한다는 목적 하에서 형이상학과 만난다.
두 번째로는 미학을 학으로서 정립하고자 했던 바움가르텐이나 칸트와 같은 이전의 독일미학과 다르게 쇼펜하우어는 미적 인식의 기반을 개념적 사유와 이성의 합리성에 두지 않고 비합리적인 직관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이다. 주지한 바와 같이 쇼펜하우어는 개념에 의한 사고보다 직관에 의한 인식을 더 우위에 두었으며, 그에 따라 개념의 관계로 이루어진 학문보다 이념을 발견하는 미적 직관을 더 근원적인 인식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서 보자면 학문적 인식보다는 예술적 체험이 오히려 본질에 이르는 직접적인 형이상학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은 세계의 본질을 드러내는 직관의 언어로서, 이는 이전 철학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한 철학과는 다른 비논리적 방식의 대답이자 철학과 동일한 질문, 동일한 목적의 신체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즉 쇼펜하우어에게 철학이 개념을 가지고 하는 형이상학이라면, 음악은 소리를 가지고, 비극은 플롯을 가지고, 회화는 색을 가지고, 조형은 형태를 가지고, 영화는 이미지를 가지고 하는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예술은 직관을 통한 비개념적, 비합리적 형이상학인 것이다. 공병혜는 개념보다 직관을 중시하는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에 대하여 "미학사적으로 그의 예술론은 서구의 이성 형이상학에 근거한 칸트에게서 헤겔에 이르기까지의 독일 관념론적 미학의 와해를 예고"한다고 평가한다. 예술에서 미적 직관을 중시하는 관점은 숭고 체험에서도 역시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이와 관련하여 반데나빌레(Vandenabeele)는 "숭고는 인간의 감정(affective), 체화된 경험(embodied), 제한된 본성(finite nature)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숭고 체험에 있어서 판단보다는 감정과 신체적 경험을 중시한다는 것은 일견 버크의 경험주의적 숭고론과 닿아있는 듯하지만, 주지하다시피 크기와 위력의 대상적 속성과 신체적 반응을 대응시키며 그 유형을 미와 숭고로 구분한 경험주의적 관점과 달리 쇼펜하우어는 신체적 촉발로부터 출발한다 할지라도 결국 심성의 고통을 넘어 정신의 고양에 이르는 이념 조망에 숭고의 본질을 둔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지평을 갖는다
세 번째로는 예술을 철학적 사유와 동일시함에 따라 다다르게 되는, 개인의 삶에서 차지하는 예술의 윤리적, 종교적 역할을 들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은 개체의 욕망이나 이해의 세계를 떠난 형이상학적 관조에 다다르는 것을 궁극적으로 지향한다는 데서 이미 삶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담는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예술철학에 할애된 3장에 이어 윤리학에 관한 논의인 4장으로 종결된다는 것은 그러한 궁극적 지향을 암시한다. 즉 예술철학에의 삶의 고통에 대한 관조와 체념의 태도는 윤리학에서 말하는 타인에 대한 연민(Mitleid)을 위한 전제가 된다는 점에서, 쇼펜하우어에게 예술은 삶의 윤리와 맞닿아 있는 체험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쇼펜하우어가 예술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삶의 일시적인 구원으로서 표현한다는 점에서 예술의 종교적 역할 또한 거론되기도 한다. 박영선은 비극에 대한 논의에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미학을 통해서 예술과 윤리 사이의 매개체로서의 비극의 주요 기능을 재구성"한다고 말하며, 쇼펜하우어에서 예술의 정당성은 "성자의 차원에서 가능한 체념과 자아의 포기를 철학의 종결, 윤리의 완결로 간주"하는데 있음을 강조한다. 셰어(Scheer)는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이 이론철학에서 실천철학으로의 이행을 의미한다고 말하며 미적 관조를 통해 달성된 무욕성은 도덕적 의미에서의 자유로 파악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예술철학의 이러한 실천적 함의를 강조하며 쇼펜하우어에 이르러 "구원의 표상이 종교에서 예술로 이행"한다는 언급에까지 나아간다.
결국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에 있어 예술은 철학함의 행위로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은 예술이 하나의 형이상학적 활동이라는 점을, 그의 의지 형이상학 체계에 토대를 둔 예술의 의미부여를 통해 증명한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예술, 그리고 미와 숭고의 감정은 모두 그의 형이상학 체계 내에서 설명되어야 하며, 궁극적으로 형이상학과 예술철학은 하나의 사상이다. 즉 쇼펜하우어의 철학에는 단 하나의 사상이 설파되는데 이것이 지닌 여러 계기의 측면에 따라 형이상학, 윤리학, 예술철학으로 분화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쇼펜하우어에게 표상의 인식론, 그리고 의지의 존재론, 이념의 예술론, 연민의 윤리론은 모두 의지 형이상학이라는 하나의 사상으로 수렴되며, 그 모두가 하나의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예술 또한 형이상학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