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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론과 숭고미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정의 본문
쇼펜하우어의 예술체험과 관련된 논의에 있어서는, 이념을 조망할 수 있는 비범한 능력의 예술가로 천재를 전제하고 개체의 욕망을 벗어난 무욕성을 요청한다는 면에서 현대 예술이 지향하는 개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써의 의미를 배제하게 되는 한계가 지적된다. 다시 말해 예술을 이념으로의 정신적 고양이 허용되는 천재만의 전유물로 취급하고, 천재만이 예술의 주체가 될 수 있으며 감상자는 단지 수동적인 지위에서 천재의 예술성을 수용할 뿐이라는 주장은, 예술의 생산과 감상이 대중화되고 창작자와 감상자의 구분이 사라지는 오늘날의 시대에는 수용하기 어려운 배타적 관점으로서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천재'라는 표현은 오늘날의 미학 이론에서는 더 이상 논의되지 않는다. 예술가 개념 조차 퇴색하여 작가, 제작자, 생산자 등과 같은 개념들로 대체되고 있다. 오늘날 천재 개념에는 비합리주의 및 사이비 낭만주의라는 오명이 결부되어 있다. 게다가 여기서의 천재는 현대적 의미의 천재, 즉 예술적 표현의 잠재능력이 뛰어난 자를 지칭하기보다는 개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구도자를 의미한다고 했을 때, 자칫 예술과 종교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혹은 예술을 종교적 의미로 덮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셰어(Scheer)는 쇼펜하우어의 천재 개념을 종교적 의미에서의 '구원자'로서, 또는 구원될 길을 앞장서가는 근대의 '사도'와 같은 역할로 해석한다. 그럼으로써 예술을 극소수의 특별한 자에게만 국한시키거나 자격을 강요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수의 대중이 예술가를 자처하고 일상적인 창작을 예술 행위로 간단하게 취급하는 경향에 대해, 진정한 예술과 예술가의 의미에 대해서 재고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의의 또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또한 예술 체험의 가치 측면에서 보았을 때 고통에 대한 체념과 연결 짓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지적된다. 이는 예술철학뿐 아니라 쇼펜하우어의 철학 전체에 드리워진 염세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문제제기와도 연관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쇼펜하우어가 예술을 삶의 고통으로부터의 위안이라는 관점에서 그 목적과 의미를 탐색했다는 점에서, 삶 속에서의 예술의 역할을 논할 때 취할 수 있는 관점 중 하나로서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 예술관에 대한 극복과 대안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모색되어 왔다. 그리고 여전히 삶에서 예술이 가질 수 있는 긍정적인 가치에 대한 탐색의 끈은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미학사에서 숭고개념은, 부각되었던 잠깐의 시기와 망각된 대부분의 시기를 반복하는 역사를 거처 왔다. 롱기누스에 의해 수사학적 가치로서 제기되었던 숭고 개념은 그 이후 전혀 언급되지 않다가 근대에 이르러 버크와 칸트에 의해 미와는 구분된 보편적 감정으로서 부각되었다. 버크는 숭고의 대상적 속성과 대응되는 심리적 특성을 종합하였으며, 칸트는 어떤 대상에 대해 '숭고하다'는 판단이 가능하도록 이끄는 인식의 선험적 원리를 밝혀내고자 하였다. 칸트의 미학을 통해 숭고는 미의 판단에는 없는 이성의 무제약적 이념의 역할을 통해 단순한 미적 감정 이상의 인식론적 의미를 획득하며 지금의 숭고 개념의 전거가 된다. 칸트에게 있어 숭고의 체험은 감성의 한계와 좌절을 넘어서는 이성의 우월함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러한 이성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이념인 도덕성에로 이끈다는 점에서, 미와는 다른 이성의 자기 초월적 가치를 끌어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화와 통일의 형식을 추구하는 주관의 합목적적 판단에서 미의 완전성을 찾고자 했던 칸트는 통일적 형식으로 포착하지 못하는 몰형식에서 비롯된 숭고를 부수적인 미의 하위 감정으로 귀속시켰으며, 또 한편으로 숭고 체험의 궁극적 의미를 도덕적 정신으로의 고양에 한정시킴으로써 미학적 논의의 중심에서 숭고를 배제시키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이로 인해 숭고는 미학의 주변 개념으로 밀려나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한다면 칸트 미학에 대한 비판, 특히 미와 숭고의 개념을 오성과 이성의 추상적 사유와 분리하고자 했던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을 다시 조명해보는 일은 오늘날 숭고 개념을 다루는 데 있어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은 숭고개념뿐 아니라 미학의 역사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거나 혹은 칸트 미학의 연장선 수준에서만 다뤄질 뿐이다. 주지하였듯이 칸트 미학의 비판 위에 정초 된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을 단순히 칸트의 연장으로 이해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며, 따라서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이 가지는 미학사에서의 독특한 위치와 예술과 숭고의 체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가진 의의에 대한 재조명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은 미적 체험을 이성의 합리적 인식의 체계와 단절시키고 개념이 관여하지 않은, 충분 근거율에 속하지 않은 순수한 주관의 미적 직관을 상정함으로써 미적 체험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미적 직관은 이념을 조망하는 순수 주관의 직관으로서 세계의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과 관련되며, 이러한 인식의 지평에서 예술은 단순한 재현의 기술이 아닌 세계와 삶의 본질을 사유하는 철학함의 지위로 올라선다.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은 주관의 반성적 판단으로 한정된 칸트 미학뿐 아니라, 사물의 단순한 모방과 재현이라는 예술에 관한 기존의 제한된 규정 범위를 넘어서서 그 의미를 확장하는데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그리고 이러한 미학적 논의의 확장과 형이상학적 인식으로서 미적 체험의 의미를 탐구하는데 숭고는 미 이상의 중요한 가치를 지닌 개념으로 부각된다. 아울러, 쇼펜하우어의 숭고개념은 삶에서 예술이 가지는 위안으로서의 역할에 형이상학적 토대를 제공함으로써, 단순한 감상의 즐거움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예술에 부과하고 이를 찾아 나설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한다. 예술을 통한 숭고의 체험은 삶의 고통을 부정하기를 멈추고 삶의 본질로서의 고통을 관조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마음의 진정에 이를 수 있는 안식처로 안내한다.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예술과 숭고의 체험은, 현대 사회의 가속화되는 나르시시즘의 경향 앞에서 자신과 삶을 성찰하게 하는 계기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감각적 자극과 단편적 정보로 넘쳐나는 복잡하면서도 공허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욕망 너머의 삶의 의미를 자문하게 하는 철학으로서 예술의 길을 제시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