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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철학과 불교 철학의 관점 차이 본문
고대 그리스에서 변화를 부정한 철학의 시원은 엘레아학파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E 515~475)이다. 그는 최초로 변증법을 통해 '부동(不動)의 일자(一者)'를 논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다자(多者)'와 '운동'을 부정하였다. 그의 논증은 서구 존재론(ontology)의 출발점이 된다. 파르메니데스의 충실한 제자 제논(Zeno, BCE 495~430)은 자기 스승의 운동성 부정의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여 이성적 귀결이 경험적 사실과 영원히 만나지 못하도록 평행(parallel)이 되게 하였다. 역설(para-doxa)이란 논리와 사실, 혹은 이성과 경험이 접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para)을 달리는 의견(doxa)이다. 제논은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은 매 순간 정지해 있으므로 목표점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당겨진 화살이 과녁으로 날아가 꽂힌다는 것은 완고한 경험적 사실이지만 그는 순수한 이성적 논증의 힘만으로 그러한 사실을 부정한 것이다. 그는 역설(para-doxa)적 논변을 통해서 사물의 운동을 부정하여 변화와 생성을 부정하는 자기동일성 철학의 기초를 세웠다. 이러한 변화 부정은 시간에 관한 인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시간의 흐름이란 사물의 운동과 변화 때문에 인식되는 것이기 때문에 변화와 생성을 부정한다면 시간의 흐름도 부정하거나 그 인식을 왜곡하게 된다. 그러므로 불변적 동일성의 철학과 관계-생성의 철학 대립은 시간관에 대해서도 본질적인 관점의 차이를 보인다.
그런데 제논이 운동을 부정한 것과 비슷하게 불교 철학에도 사물의 변화와 운동을 부정하는 주장이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동진(東晋)의 승려 승조(僧肇, CE 384~414)가 지은 "조론(肇論)" 중의 '물불천론(物不遷論)'은 제목 그대로 '사물(物)은 변천하지 않는다(不遷)'는 의미이다. 그는 "목적지를 보고 자기가 갈 곳을 알지라도 가는 자는 목적지에 이르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사물의 운동과 변화를 부정하고 있다. 이는 제논이 "화살은 목표점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한 역설적 주장과 표면적으로 매우 닮아있다. 제행무상의 법인(法印)에 따라 생성과 변화를 근본 입장으로 하는 불교 철학에서 변화와 운동을 부정하는 동일성 철학의 논리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을 것인가?
불교 철학사에서 특히 중국 불교사에서 승조법사가 차지하는 위치를 보았을 때 이러한 그의 주장은 불교의 개방적 사유의 넉넉한 품이 허용하는 다양한 관점의 하나로 보기에는 근본적인 부분에서 어긋난 것처럼 보인다. 그의 운동 부정의 주장이 불교적 사유의 미숙한 이해에서 비롯한 오해 때문일까, 혹은 위/진 시대에 무차별한 경전 번역의 홍수 속에서 암암리 설일체유부 계열의 실체론적 사유의 영향 때문일까? 아니면 논자가 제시하는 동일성의 철학과 생성의 철학의 대립이라는 거시적 사유구도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 데서 오는 논리상의 누수 현상일까?
승조는 대역경가인 구마라집(鳩摩羅什, kumarajiva, CE 344-413)의 수제자로서 그에게 불교학을 배우며 "중론" 등의 반야부 경론의 역경사업에도 직접 참여하였다. 또한, 위/진 시대의 철학사조인 현학(玄學)적 불교이해인 격의불교(格義佛敎)를 청산하고 반야공관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한 최초의 중국승려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사상은 길장(吉藏, CE 549~623)의 삼론학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천태교학과, 화엄교학의 기초논리를 제공하고, "종경록" 등 선(禪) 문헌에도 빈번히 인용되어 중국 특색의 불교 즉 선불교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불교사상 형성에서 승조법사가 차지하는 중요성과 영향에 비추어 그의 사유의 핵심을 형성하는 운동성과 시간성의 부정의 논리가 불교 본래의 연기적, 관계적, 생성적 사유와 얼마만큼 어떠한 방식으로 호응하는지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승조에 대한 그동안의 선행연구는 몇 가지 방면으로 이루어졌는데 크게 위진현학과의 관계, 격의불교와 관계, 반야중관학과의 관계 등 주로 불교사상 내의 흐름이나 중국 고전 사상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주로 불교사상 내의 흐름에서 승조의 위치를 파악하려는 연구가 많이 보인다. 중관학과 관련해서 승조가 용수의 공사상을 정확히 이해하였는가에 따라 연구자들은 상반된 논쟁적 평가를 내린다. 특히 공사상의 이해와 계승이란 주제와 관련해서 '물불천론'이 주요 분석 텍스트로 언급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사물이 변천하지 않는다'는 '물불천론'의 논지가 설일체유부의 철학이 주장하는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의 실체적 관점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승조가 인도의 중관학을 충분히 이해하고 정통적으로 계승했다고 보는 연구가로는 삼론학을 정립한 길장(吉藏, CE 549~623)이 있다. 길장은 승조를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고 칭하며 반야에 대한 현학(玄學)적 해석인 격의불교를 청산하고 삼론학의 실질적 출발점으로 승조를 평가한다. 또한 전통적인 주석방법론으로 "조론"을 연구한 교가들도 대체로 동일한 입장이다. "조론소"를 지은 원강(元康), "조론약주"를 지은 감산 덕청 등이 그들이다. 근대에 들어 같은 입장을 가진 연구가로 탕융동(湯用?, CE 1893~1964)을 들 수 있다. 그의 저작인 "한위양진남북조불교사"는 중국 고대불교연구의 기본적 시각을 제시한 역작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