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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의 운동부정에 관한 논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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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의 운동부정에 관한 논리

k지니 2021. 7. 29. 07:58

영사기의 기본구조는 필름이 말려있는 위아래의 두 개의 큰 필름 통과 중간에 빛을 비추는 램프가 있다. 각 필름의 컷들은 고유하고 고정된 화면을 가지고 있고 하나의 컷과 컷 사이는 불연속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위쪽 필름통에는 아직 상영되지 않는 필름이 감겨있고, 그것과 이어진 아래 필름통에는 광원을 이미 통과한 필름이 되감기고 있다. 그리고 위 필름통에서 아래 필름통으로 옮겨가는 중간의 슬릿에는 램프의 불빛이 나와서 한 컷 한 컷의 필름을 투과해 스크린에 비추고 있다.

스크린 위에서 영사된 사물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단지 필름이 영사기에서 빠른 속도(컷당 4/100초)로 필름을 이동시키기 때문에 우리의 시각의 잔상효과에 의해서 정지된 화면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아직 상영되지 않은 위쪽 통의 필름은 미래의 것으로 이미 완전히 실유하고 있고, 이미 상영된 아래 통의 필름도 소멸하지 않고 완전히 실유하고 있다. 이러한 비유의 의미를 사쿠라베 하지메(櫻部建)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처음의 릴(reel)은 다르마(dharma ; 法)가 경과하는 삼세 중 미래의 영역에 해당되며, 광원에 의해 비치는 순간은 현재에 해당되며, 광원을 통과해 지나간 필름들이 되감긴 릴은 과거의 영역에 해당된다. 필름의 한 장면 한 장면이 곧 다르마, 엄밀히 말하면 함께 생기하는 무수한 다르마의 집합이다. 그리고 스크린에 비친 영상의 활동, 변화에 의해 구성된 이야기는 현실의 경험의 세계 즉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세계에 해당된다. 릴에서 릴로 필름이 흘러가듯 다르마의 시간은 횡으로, 공간적으로 펼쳐져 있다. 스크린에 투영된 이야기의 경과와 같이, 경험적 시간은 이를 종으로 관통한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정지된 영상을 지닌 필름의 컷들은 법체를 나타내고, 위 아래의 필름통은 삼세에 비유된다. 램프의 불빛의 순간순간의 통과는 찰나적 작용을 나타낸다. 이렇게 이해하면 삼세의 실유와 법체의 불변적 항존성과 찰나적 변화의 작용을 조합해서 현상적 사물의 무상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지된 운동 혹은 불변적 요소로 분해된 실재의 단면(컷)을 이어 붙여서 변화와 운동과 생성을 착시적으로 일으킨 것에 불과하다. 이런 측면에서 영사기 비유로 이해하는 설일체유부의 입장은 앞서 베르그송의 '영화적 착각'에 해당하며 위에서 사쿠라베 하지메가 "다르마의 시간은 횡으로, 공간적으로 펼쳐져 있다"고 인정한 것처럼 시간을 공간화한 사유의 일종이다. 아비달마의 시간론은 마치 사물들이 공간적으로 벌려져 있는 것처럼 시간 속의 다르마들이 횡적으로 동시적으로 벌려져 있다고 보기 때문에 시간을 생성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정지된 시간을 나열하는 것으로 흐름을 설명한다. 이로서 변화 현상에 대한 설일체유부의 실체론적 해석은 대승 공사상의 철저한 연기론적 무실체사유의 비판을 받게 된다. 대승은 붓다 본래의 연기법의 정신에 충실한 무상(無常)의 세계상을 생성하는 실상 그대로 복원하기 위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한다. 엘레아학파는 이러한 경험적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변화를 단지 믿지 못할 감각의 착각으로 간주하였다. 서구 존재론은 이런 파르메니데스의 부동의 일자를 극복해야하는 과제 속에서 성립하였다. 그러나 불변적 실체에 대한 엘레아의 유산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채 세계의 변화와 생성을 설명하려 했다. 한편으로 실체를 세계의 근본적 요소로 두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 실체들의 관계로서 변화와 생성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래서 출현한 것이 본체-현상의 이원적인 틀이다. 실체론적 사유의 이러한 세계 이해가 설일체유부와 공통의 사유 패턴으로 귀착된다는 것을 앞서 영화적 착각의 논증을 통해 살펴보았다.

여기서 한가지 검토해야 할 것은 본체-현상, 실체-속성이라는 이원적 도식의 세계 이해 방식이 인류사에 서로 분리된 지역에서 어떻게 공통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우리는 그 공통의 기원을 언어에서 찾을 수 있다. 시간을 공간적인 것과 혼동하는 것은 인간 지성의 일반적인 경향인 것 같다. 추상적인 것을 시각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사고 습관이 지성에는 더욱 자연스럽고 편한 것이다. 지성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하는 것, 경계가 모호한 것을 고정시키고 사물을 분해하고 분별하여 인간의 생존의 도구적 필요를 충족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지성의 분별 작용의 이면에는 인간의 언어습관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구 상에 사용되는 언어는 다양하지만 공통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반드시 주어(S)와 술어(P)로 구성되어 있다. 주어+술어적인 언어습관은 세계를 주체와 그것의 활동/작용으로 파악하게 한다. 다시 말해 주체와 그 활동, 혹은 실체와 그것의 속성의 이원적 짝으로 세계를 인식함은 세계가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주어-술어적인 언어구조가 그런 인식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이는 인식이 언어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언어가 인식을 결정한 것이다. '실체와 속성의 사유도식'은 '주어와 술어의 언어형식'에 의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나뭇잎은 녹색이다'라는 명제에서도 실체와 속성의 사유 도식이 전제되어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X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나뭇잎이라는 것, 또한 그것이 녹색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녹색이라는 성질을 담지하고 있는 '무엇'으로서의 X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변하는 현상 아래에(sub) 있는 불변적 존재(stance)를 실체(substance)라 한다. 그리고 변하는 것은 실체에 속한 성질(qualit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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