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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자와 생성성 본문
앞선 논의에서 우리는 운동, 변화, 생성을 거의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였다. 일상 언어의 다양한 맥락에서 이 표현들은 구별되기도 하고 혼용되기도 한다. 물리적으로 물질의 공간상의 이동을 기술할 때는 주로 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화학에서는 물질의 다양한 상태로의 전이를 변화라고 하고, 보다 일반화해서 시간성 속에서의 타자화를 생성이라고 구별해서 부르기도 한다. 즉 생성(Becoming)이란 다자(多者)들이 상호 관계성 속에서 변화하는 것이며, 그렇게 생성하는 다자는 생성자(生成者)이다.
운동, 변화, 생성 등의 용어는 모두 현상세계의 시간적 흐름 속에서 차이를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가족적 유사성을 가진다. 현상(現象)이란 말 그대로 우리의 경험과 감각에 드러난(現) 모습(象)이다. 현상계는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의 변수 속에서 변화하고 운동하는 세계이다. 밤낮이 바뀌고, 춘하추동의 변화를 겪고,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의 의식도 끊임없이 흐른다. 변화에 대한 인식은 우리의 상식적 경험의 기저를 이룬다. 불교의 연기와 무상과 무아의 진리는 이러한 생성의 현상계를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동시에 불변의 초월적 본체계(本體界)에 대한 봉쇄를 함축한다.
승조는 이러한 변화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거부하는 말로 『물불천론(物不遷論)』을 시작한다. "생사가 교대로 바뀌고 한서가 번갈아 변천하여 사물이 유동한다고 하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고정관념이다. 나는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어째서인가? 『방광반야경』에서 이르길, '만법은 오고 감이 없고 운동과 변화도 없다.'라고 하였다."라고 말한다. 사물이 변화 유동한다는 것은 일반인들의 일상적 인식이다. 그러나 이런 상식 차원에서 이해하는 사물의 운동과 변화에 대한 인식에는 실체론적 사유가 암암리에 깔려 있다. 앞선 논의에서 주어(실체)+술어(속성) 구조의 언어습관이 운동에 대한 일상적 이해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일반인들의 운동에 대한 상식적 인식이 이미 주어-술어적 언어로 되어 있고 실체-속성적 세계 파악으로 오염되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새가(S) 난다(V)"고 할 때 '난다'라는 동사의 주체로서 이미 '새'의 존재가 설정된다. 이러한 언어구조는 암암리 '새'가 존재론적으로 선재하고 그 존재하는 새가 '난다'고 하는 이해방식을 강요한다. 그러나 사실은 새가 실체로서 있고 나서 그 새가 나는 것이 아니다. 직접 경험되는 것은 단지 난다고 하는 동사적 사태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직접 경험이 인식되거나 전달되기 위해서는 또다시 언어적 틀을 빌려야 한다. 주어/술어적 구조 속에서 언어화하는 과정을 거치며 동사의 주체로서 새가 사후적으로 재구성된다. 일단 이렇게 자기 동일자인 주어가 가설되고 나면 '새가 난다.', '새가 운다', '새가 잔다.' 등 무수히 '새가 ~한다.' 로 표현될 수 있고, '난다', '운다', '잔다'라는 다양한 동사적 사태는 새라는 고정된 동일자에 덧붙여진 속성(attribute)이 된다. 실체란 다른 것에 의해 서술될 수는 있어도 다른 것을 서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른 것에 의해 서술되는 것, 문법적으로 말해서 주어가 되는 것이 실재이다. 실재 이외의 다른 것들은 모두 술어들이다. 어떤 것을 서술해주는 것들이다. 따라서 이것들이 어떤 것(즉 실체)을 전제하고서 그것을 꾸며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문법적으로는 동사와 형용사), 실체에 비해 부차적인 존재이며 실체에 부대(附帶)하는 것들이다.
주어-술어적 언어구조에 종속하는 실체-속성적 세계이해의 문제를 승조도 「반야무지론」에서 언급하고 있다. "작용(用)은 적멸(滅)에 상즉하고, 적멸은 작용에 상즉한다. 작용과 적멸의 체가 하나이다. 동일한 근원에서 나와서 이름을 달리했을 뿐이다. 또한 작용 없이 적멸이 별개로 있지 않고, 그것이 작용의 주체가 되는 일도 없다."라고 했다. 작용과 적멸의 상즉성을 언급한 이 말은 「물불천론」에서 운동과 정지의 상즉성을 언급한 것과 상통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며,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대승 이념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실제의 이치에서는 한 티끌도 허용치 않는다'는 무소득의 무차별지의 입장을 적멸(滅)로 보고, '보살의 만행문에서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일에서는 한 법도 버리지 않는다'는 실천의 입장을 작용(用)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논점과 관련해서 주의를 끄는 것은 '작용 없는 적멸은 없다.(無無用之寂)'라는 표현이다. 그것은 동사적 작용과 독립적으로 실재하며 그 모든 작용을 속성으로 담지하고 있는 적멸한 자기 동일적 실체는 없다는 언급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작용과 분리된 적멸한 실체가 그 작용의 주어(주체)가 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