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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조의 물불천의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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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조의 물불천의란

k지니 2021. 8. 2. 08:11

승조의 물불천의 주장의 배경은 그가 보기에 주어-술어 혹은 실체-속성의 방식으로 엮어진 일반인들의 상식적 변화 인식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즉 역동적 흐름 그 자체로서의 무상한 세계 실상에 대한 불철저한 이해를 문제 삼는다. 승조의 관점에서는 자기 동일자로서의 사물[物] 자체가 해체되어야 비로소 생성의 의미가 드러나고 동사적 세계상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승조의 물(物)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현대적 의미로 물(物), 혹은 물체는 다양한 속성을 담지한 동일적 존재로서 공간적인 연장을 가지며 물질 상호 간에는 서로 침입되지 않는 불가입성(不可入性; impenetrablity)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문의 고전적 맥락에서 '物' 은 단지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이나 사건(event)을 포함한 현상 일반에 대해서도 사용되며 사물(事物)로 통칭된다. '한어대사전'에 따르면 物의 의미는 만물(萬物), 사무(事務), 사정(事情), 사람(人), 의지(志), 인식(識) 등의 의미가 있다. 불교문헌에서는 "如來為物應生先小後大 : 여래께서 중생들을 위하여 근기에 응해서 먼저는 소승을 후에 대승을 설하셨다."라며 중생의 의미로도 사용한다. 이러한 면에서 물(物)은 포괄적으로 현상계의 모든 존재자를 통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승조의 물(物) 개념에는 현상적 사물과 사건을 지칭하면서도 동시에 그 속에 상호의존적 연기성과 유동적 변화성이 깔려있어 이미 타물(他物)과 격절성을 가지는 독립된 존재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적 사물개념이 베르그송의 말처럼 공간 개념에 물들어 기하학적 선으로 서로 나누어져 가분적이고, 동질적, 상호 외재성으로 정의되는 것과 구분해야 한다. 그것은 상호 상입(相入)적이며 변화의 가변성 속에 열려있다. 승조가 『물불천론』과 비슷한 시기에 저술한 자매서인 『부진공론(不眞空論)』에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삼라만상이 비록 다르다 해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므로 다양한 형상들은 실체적 형상[眞象]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형상이 실체적 형상이 아니므로 비록 형상이라 해도 형상이 아니다. 그런 즉, 만물과 내가 뿌리가 같고(物我同根), 옳고 그름이 한 기운(是非一氣)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승조가 남긴 명구로서 노장과 불교의 만남의 기념비적 표현인 "천지와 나는 한 뿌리이고, 만물과 나는 한 몸이다(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라는 사상의 출발점을 엿볼 수 있다. 이 표현은 『장자』의 「제물론」에 거의 비슷하게 등장한다. "天地與我竝生, 而萬物與我爲一. (천지는 나와 더불어 함께 생성하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가 된다.)" 단지 승조는 '竝生'을 '同根'으로, '爲一'을 '一體'로 달리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승조에게서 이들 표현은 거의 일치하는 담론을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서 '同根'은 실체적 동일성의 의미가 아니고 생성적 보편성인 '竝生'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성자는 장자와 승조의 의미 맥락을 구분한다. 그는 物我同根이 결코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세계의 본체적 근원을 전제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오온의 경험세계를 떠난 열반을 말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논자는 노장과 불교의 연기법적 사유가 모두 동일성의 철학에 대립하는 생성적 사유를 근본으로 한다는 입장에서 승조가 그러한 생성론적 관점으로 노장을 불교와 융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여기 승조의 '물(物)'의 용례를 보더라도 우선 삼라만상과 자신를 포함한 인간을 지칭할 뿐 아니라 '기(氣)'라고 표현되는 현상물을 구성하는 에너지와 현상적 사건-즉 시비- 까지도 포함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사물은 허(虛; emptiness)한 것으로서 타 존재와 독립된 실체가 아니다. 만물은 차이와 다양성을 이루나 그 형상은 자기 동일적인 것도 아니고, 연장적 배타성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형상의 다양성 속에서도 본질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승조가 "같은 뿌리[同根]", "한 기운[一氣]"이라는 표현에서 깔고 있는 통일성에 대한 함축을 우리는 실체적 동일성으로 오독해서는 안된다.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므로 다양한 형상들은 실체적 형상[眞象]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본질적 통일성의 개념이 불변적이고 실체적 형상[眞象]을 우선적으로 배제하기 때문이다. 동근(同根), 일기(一氣)라는 말이 함축한 통일성은 사물과 별개의 제3의 통일적 실체를 상정한 말이 아니다. 사물 그 자체가 일기(一氣)이고 연기적 관계성의 뿌리로 얽혀 있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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