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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불래불거 본문
승조의 물(物) 개념을 다시 정리하면 비실체적 생성자이다. 생성을 본질로 하며 생성의 과정 중에 있는 사건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만물(S)이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 그대로가 생성이다.' 굳이 본체론적인 언어로 표현해 본다면 현상 그대로가 본체이지, 현상 외에 달리 본체가 없다. 곧 현상에 내재한 생성성이 본체이지 현상을 초월한 불변적 본체가 아니다. 이러한 현상 일원적 해석을 통해 『부진공론』의 결론이자 말후구(末後句)인 "촉사이진(觸事而眞; 경험하는 현상적 사물 그대로가 실재이다.)"을 음미해 볼 토대가 마련된다. "서있는 그 자리가 참이다(立處卽眞). 그러하니 도(道)가 멀리 있겠는가? 접촉하는 사물이 모두 참이다(觸事而眞)."
우리는 여기서 임제선사의 유명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 어디서든 주체적일 수 있다면 있는 그 자리가 모두 진리이다.)"이라는 생성계에 대한 절대긍정의 선(禪)적 언어의 원형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일원적 사유에서 중생과 부처의 이원성, 예토(穢土)와 정토(淨土)의 이원성이 해소되는 논리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모든 사건과 사물과 상황은 생성자의 범주에 들고, 진제와 공성은 모두 생성성의 범주에 든다. 두 범주의 관계는 불이(不二)로서 내재적 초월이다. 생성은 생성자의 일반성이므로 초월적이고, 생성자는 생성하는 개별자이므로 내재적이다. 생성적 일원 틀 속에서 진속(眞俗)의 두 범주는 불이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 용수의 공사상이 철저한 부정의 논리로서 실체론적 사유와의 투쟁을 통해 파사(破邪)하였다고 한다면, 승조는 그 이면의 생생(生生)하는 무실체적 연기적 실재 세계를 절대긍정의 논리로 현정(顯正)하려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불교는 생노병사의 고(苦)의 문제를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계절의 변화와 사물의 변천은 외부 세계의 객관적 사실 이전에 인간이 경험하는 한계상황에 대한 실존적 문제로 다가온다. 그러나 승조는 생로병사의 변화라는 자명한 경험적 사실을 "사람들의 고정관념(人之常情)"일 뿐이라고 정면으로 부정한다. 그리고 그러한 부정의 전거로 『방광반야경』에서 "만법은 오고감이 없고 운동 전변 하는 것도 없다."라는 무실체적 공사상을 제시한다.
그러나 공사상은 고정불변의 실체적 존재를 부정하고 세계를 상호의존적 연기에 의한 변화와 생성으로 바라보는 사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승조가 생사변화를 긍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부정하는 이율배반적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이런 상충에 직면하여 혼동을 일으키는 이유는 상호 이율배반적 주장을 동일한 논리적 근거 위에 배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석의 편의상 이런 상충적 주장을 서로 다른 논리의 층에 배열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러한 방법은 승조 자신이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승조는 변화와 운동을 바라보는 일반인의 관점과 자신의 관점을 서로 병치하며 논지를 전개한다.
일반인들의 '운동긍정 정지부정[動而非靜]' 주장과 승조의 '정지긍정 운동부정[靜而非動]'의 주장이 병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서로 반대되는 주장에 대해서 양자는 동일한 현상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이 우선 주목된다. 일반인과 승조가 공히 "과거 사물이 현재에 이르지 않는다(昔物不至今)"고 하는 "동일한 근거(所造)"를 가지고 있지만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같지 않다(所見未相同)."고 승조 스스로 진단한다. "과거 사물이 현재에 이르지 않는다"는 전제를 일반인과 승조가 모두 공유하면서 결론을 정반대로 가져가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전제가 동일한 논리의 층에 놓인 것으로 보고 모순적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동일한 현상이라고 해도 실체론적 논리층에서 파악한 것과 생성론적 논리층에서 파악한 것은 다르다. 승조는 이러한 관점의 차이를 단지 양시론(兩是論)적 관점주의로 처리하지 않는다. 일반인의 불래(不來)의 관점과 자신의 불거(不去)의 관점을 상대주의적으로 혼합하여 불래불거(不來不去)의 논리를 세운 게 아니라 일반상식적 시각을 "눈앞에 진리를 마주하고도 깨닫지를 못한다[目對眞而莫覺]."고 비판한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분석해야 할 것은 일반인들의 운동에 대한 관념이다. 승조가 보기에 모든 것이 변화하고 무상하다는 불교적 진리는 상투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만일 무자성공의 입장에 서 있다면 어떤 실체적 존재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물'이 존재하길래 움직인다 혹은 변화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꽃이 핀다.' '꽃이 진다.'고 말하면서 무상을 언급한다. 그러나 암암리에 '핀다' '진다'하는 동사적 사태에 지속하는 동일자로서 꽃을 상정한다. 무상이란 주어적 동일자가 피고 지는 동사적 변화를 거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동일자 그 자체가 무상한 것이다. 생성자 그 자체가 생성하기 때문에 무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무상하다고 하려면 사물의 변천은 부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