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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동사적 사건 개념 본문
승조가 말하는 사물[物]은 생성자이며 명사적 실체가 아니라 동사적 사건에 가까운 개념이다. 한 순간 속의 생성자는 그 시간을 내용적으로 채우는 연기적 사건의 총체이다. 하나의 사건이 바로 그 사건의 시간이 된다. 그러므로 위 문장을 '과거사건은 과거에 그대로 있고, 현재 사건은 현재에 그대로 있다(昔物自在昔, 今物自在今)'로 다시 새겨보면 실체적 이해가 보다 순화된다. 과거사건은 과거를 이루고 있으며 현재 사건은 현재를 이룬다. 시간은 그 자체가 사건의 총체이지 사건을 그릇처럼 담고 있는 별개의 공간적 시간은 없다. 시간과 사건[物]이 별개가 아니다. 생성자는 끊임없이 순간순간 생성한다. 이 생성을 시간이라고 명칭 한 것일 뿐이다.
승조의 논지를 위 범지의 예로 풀어본다면, 과거의 '홍안의 범지1'라는 사건은 그대로 과거라는 시간을 연기적으로 생성하고 있으며, 현재의 '백발의 범지2'라는 사건은 그대로 현재를 연기적으로 생성한다. 백령일질(百齡一質)의 자기동일체를 전제하지 않고 세월의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그러한 형질[質] 자체도 생멸 생멸한다고 한다면 사실상 생멸 변화는 없고 각각의 시간이 각각의 사건으로 직조된다. '무엇이 변화한다'할 때 그 '무엇'이 없다면 변화를 기술할 고정된 자리가 없게 된다.
그래서 승조는 "사건[事]의 각기 성품[性]이 하나의 시간대[一世]에 머문다. 어떤 실체적 사물이 있어서 가고 옴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승조가 '물(物)'자를 '사(事)'자로 대체하였다는 점이다. 물(物)의 의미가 사건의 의미인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에게 물(物)은 어떤 고정적 '것'이 아니라 사건이며 생성자이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성품[性]은 자성적 본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생성성을 의미한다.
승조에게 성(性)은 연기성(緣起性)이며 공성(空性)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편찬한 『주유마힐경』에서도 볼 수 있다. "사물에는 고정된 모양이 없으니 그것의 성품이 비었기[性虛] 때문이다." 즉 성(性)을 '사물의 실체성이 비어있음(虛)'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화엄조사인 청량징관도 이 부분을 성공(性空)의 의미로 해석한다. "만약 사물의 각기 성품의 머묾이 진제의 상이라고 한다면, 어찌 성품이 공하기[性空] 때문에 불천이라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해석하였다.
물(物), 즉 사물-사건은 고정된 실체성이 비어있으면서 끊임없이 연기적으로 생성하면서 순간순간의 시간을 직조한다는 의미에서 생성자는 생성한다. 또한 생성자는 생성하지만 생성 자체는 생성하지 않는다. 마치 사물의 변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서 고정된 요소를 배제하고 대상과 관찰자가 모두 흐르는 것으로 바라본다면 사실상 변화의 인식은 불가능한 것과 같다. 변화 그대로가 정지이다. 그러므로 승조에게서 "운동과 정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생성자적 범주에서는 운동과 정지가 상대(相對)하지만 생성 자체에는 운동과 정지가 일여하다.
운동과 정지가 상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객이분적 상태 속에서 관찰자로서 대상을 외부에서 바라볼 때이다. 그러나 주객 이분을 해체하고 생성의 내면 속에 들어가 사물의 변화에 공감한다면 운동과 정지의 상대성은 나타날 수 없다. 생성 일원론적 세계관에서는 동(動)과 천(遷)이 그대로 정(靜)과 불천(不遷)이 된다. 곧 동정상즉(動靜相卽)의 논리가 여기서 나온다. 승조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운동을 부정하는 의도를 탐구해보면, 어찌 운동을 내버리고서 정지를 구하는 것이겠는가? 반드시 모든 운동에서 정지를 구해야 한다. 반드시 모든 운동에서 정지를 구해야 하므로 비록 운동하지만 항상 정지해 있다[雖動而常靜]. 운동을 버리지 않고 정지를 구하므로 비록 정지한다고 해도 운동을 떠나지 않는다 [雖靜而不離動]."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승조가 "운동에서 곧바로 정지를 구한다[卽動而求靜]"라는 동즉정(動卽靜)의 입장을 제시한 데서 생성론적 일원론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불교적 회통의 사유의 전범(典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승조의 회통적 사유를 바탕으로 해서 향후 불교사상사에서 다양하게 변용되는 불이(不二), 상즉(相卽), 화쟁(和爭), 일여(一如)등의 논리가 전개될 수 있었다.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진속불이(眞俗不二), 유무상즉(有無相卽), 일다무애(一多無碍), 범성일여(凡聖一如), 등 다양한 즉여 논리를 해독할 수 있는 기본적 입장이 생성의 사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