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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일체유부의 시간관 본문
유부는 처음으로 시간의 문제를 주요한 철학적 논제로 다루었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시간을 독립적 실체로 보지 않고 어디까지나 사물의 현상적 변화와 관련해서 설명한다. 이것은 유부도 다르지 않다. 설일체유부와 같은 시대에 불교와 대론했던 인도철학 학파인 바이쉐시카(Vaisesika, 勝論)는 실재에 관한 범주를 실체(dravya), 속성(guna), 행위(karma), 보편성(ssmanya), 특수성(visesa), 등 7가지로 구분하고 이 가운데 첫째 실체(dravya)에 시간을 포함시켰다. 즉 바이쉐시카는 시간을 실체로 보았다.
그러나 설일체유부는 그들이 분류한 존재의 요소의 75가지 일람표 속에 시간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유부는 무위법 이외의 유위법 72종을 모두 시간적 존재자로 보기 때문에 따로 시간을 자성을 가진 환원 불가능한 요소로 보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설일체유부는 "과거, 미래, 현재의 삼세는 실체적으로 존재한다[三世實有]"고 주장한다. 이들은 표면적으로 실체적 시간관을 부정하면서도 암암리 실체적 사유가 작동하는 것으로 보여, 이에 대한 추가적 규명이 필요해 보인다.
유부의 시간관을 분석하기 이전에 그러한 시간관을 요청한 논리 이면의 동기를 살펴보면, 거기에는 붓다의 초월성과 절대적 전지성[一切智]에 대한 주장이 있다. 붓다의 인식과 지각의 범위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사건들을 지각하는 것과 똑같이 과거나 미래의 사건들을 지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과거, 미래, 현재에 자성적 존재나 혹은 본질적 성질들이 있다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 즉 시간을 초월하는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세 가지 기간이 모두 존재하는 것이 필연적이어야 한다.
또한 삼세실유설의 내적 동기에는 수행론적 필요성도 있다. 만약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거의 모습을 반성[厭捨]하고 수행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또한 미래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흔구(欣求)하거나 기피하는 의식을 끊을 수 없을 것이다. 즉 번뇌를 싫어하고 열반을 추구하는 의식이 있으므로 그 의식의 대상인 과거와 미래도 마땅히 실재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사유되는 것은 존재해야 한다'고 사유와 존재의 일치를 주장하는 파르메니데스의 낡은 형이상학적 전제를 연상시킨다. 파르메니데스는 부동의 일자라는 불변적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서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오직 존재만을 긍정하고 비존재를 부정한 이유는 "있지 않은 것은 알 수도 가리킬 수도 없고", "말해지고 사유되기 위해서는 존재해야 한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가 무엇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신화적 존재와 사실적 존재는 혼동되었다. 신화 속에서 이야기되는 존재는 사실적 존재로 승인되었다. 이러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사유에서 서구 철학사에서 주요한 논제 중 하나인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명제가 시작된다. 구사론에서는 "인식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그 대상이 존재한다 [識必有境]. 말하자면 반드시 대상이 존재하여야 식은 생겨날 수 있으며, 대상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생겨나지 않으니, 이러한 이치는 결정적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과거, 미래세라는 대상 자체가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마땅히 소연을 갖지 않는 식[無所緣識]이 존재해야 할 것이지만, 대상인 소연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식 또한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표현하였다.
설일체유부는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 즉 경험세계에 대한 탐구를 수행의 선행조건으로 삼았다. 유부가 '식필유경(識必有境)', 즉 '인식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상이 실재한다'는 것을 철학적 기초로 삼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나간 과거나 혹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일지라도 그것이 인식의 대상이 되는 한 그러한 시간은 실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식에 무엇인가로 인식되는 한 그것이 '무엇'이라는 성질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 '엇'이 자성(自性, svabgava)이다. 식필유경(識必有境)을 철학적으로 정립한 명제가 실유 법체항유'이다. 설일체유부가 가변적 형태를 넘어서는 불변의 실체로서 시간을 상정하지 않은 것은 무상(無常)의 이법의 검열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식필유경"이라는 철학적 요청에 따라서 시간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