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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적 시간의 대상화

k지니 2021. 8. 31. 09:43

생성적 시간이란 과거시간에서 현재시간으로 흐르는 대상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가 흐름이며 모든 존재들이 거기에 참여하는 사건으로서의 시간이다. 시간은 대상화가 불가능하다. "생성적 시간의 본질은 흘러간다는 데 있으며 그것의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이 나타날 때는 이미 거기에 있지 않다." 승조가 이를 '현재에는 과거가 없고[今而無古], 과거에는 현재가 없다.[古而無今]'고 표현하였을 때 시간의 흐름이란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우발적으로 창생(創生)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승조의 이러한 시간의 비이행성[不來不去]의 주장은 비결정론을 함축한다. 만약 과거의 어떤 요소가 현재 속에 있다고 한다면 현재의 결과는 이미 과거의 가능적 원인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가능적 원인이란 결과의 제반조건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서 이미 결정된 가능성이다. 우리는 하나의 결과를 두고 사후적으로 확정되기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실체적 원인들을 이미 존재했던 것처럼 인과적으로 재배열 할 것이다. 그러나 순수한 흐름속에서의 시간은 그런 기계론적 인과성의 배열이 아니라 새로움의 요소가 지속적으로 생성되는 우발성의 연속이다. 승조는 이러한 비이행성을 "결과는 원인과 함께하지 않는다.[果不俱因]" 그러므로 "(과거의) 원인은 현재로 오지 않는다[因不來今]"고 표현한다. 흔히 오해되듯 승조가 시간의 불래불거를 주장한 것은 시간의 단멸성이나 불변성 혹은 인과의 부정이 아니다. 그의 역설(paradox)은 연기하는 실재 세계가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하고 있음을 철저히 관철하려고 한데서 나온 불가피한 표현이다. 또한 "과거가 현재로 오지 않는다"는 말이 이면에는 과거의 업습(業習)으로부터 새로움의 획득이라는 수행론적 함의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의 비이행성을 언급하고 바로 이어진 문장에서 승조는 모순되게도 시간의 이행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이는 언급을 하고 있다. "결과는 원인과 함께하지 않는다.[果不俱因]"고 하는 비이행성 주장과 "원인으로 인하여 결과를 맺는다.[因因而果]"는 이행성의 주장을 병치한다. 생성일원이라는 회일의 입장에서 해석해보면 양립 가능하다. 생성적 시간의 본질은 흘러간다는 데 있으며 이 흐름은 분할 불가능하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분리 불가능하며 따라서 그 분절된 시간단위의 왕래도 부정된다. 따라서 생성하는 시간은 비이행적이다. 또한 시간의 흐름이 분할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는 하나의 연속적 흐름을 이룬다. 과거, 현재, 미래는 분할불가능한 비단절적 흐름이다. 승조에게 이 연속적 흐름은 내용 없는 지속이 아니라 질적 내용을 가지고 부단히 흐르는 유기적 시간이다. 끊임없이 생성하는 현재의 시간은 찰나적 점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까지 포함하는 지평적 현재이며, 과거를 파지(把持)하고 미래를 예지(豫持)하는 현재이다. 그러므로 "여래의 공업은 만세에 유전하면서 상존하고, 도(道)는 백겁의 시간을 관통하면서도 더욱 견고하며", "수행의 노력은 썩어없어지지 않고[功業不可朽]" 과거의 수기(受記)는 성불의 결과를 맺게 된다[因因而果]. 우리는 그의 보편적 생성의 시간론에서 또다시 수행론적 함축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요컨대 승조의 시간론은 생성성에 바탕한 끊임없는 흐름으로서의 시간이다. 이는 실체개념에 덧붙여진 변화가 아니므로 비이행적이며, 분할불가능하므로 유기적 연속성의 시간이다.

철학사의 큰 흐름은 세계해석에 있어서 변화 중심인가 불변 중심인가에 따라 '생성의 사유'와 '실체의 사유'로 크게 나뉜다. 생성의 사유는 변화와 관계를 본질로 보며 다양성과 새로움의 '생성철학'이라고 할 수 있고, 실체적 사유는 불변적인 것을 세계의 본질로 보는 동일성의 '존재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 존재론은 고대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에서 출발한다. 그는 무수한 다자들의 생성과 운동이라는 경험사태를 외면하고 이성의 논리 법칙에만 충실하여 실재는 영원부동의 일자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존재론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파르메니데스의 충실한 제자인 제논은 스승의 '부동의 일자'를 옹호하기 위하여 여러 역설적 논증을 통해 다자와 운동의 불합리를 증명하려 하였다.

승조는 설일체유부의 실유적 관점을 극복하려 한 용수의 공사상을 계승한다. 유부의 관점은 불변적 법체(法體)를 영화필름처럼 이어붙여 사물의 변화를 설명하려 한 것으로 이는 실체적 사유방식인 영화적 착각이 작동한 것이다. 요컨대 베르그송이 서구 존재론을 비판하기 위해서 사용한 영화적 착각이란 개념을 빌려서 설일체유부의 실체론적 관점도 분석할 수 있다. 용수와 승조는 기본적으로 베르그송과 마찬가지로 생성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며 유부의 실체적 관점을 넘어선다. 승조가 불래불거(不來不去)의 논증을 통해서 운동을 부정한 것은 일반인들이 암암리 깔고 있는 변화와 운동에 대한 실체론적 사유를 부정하기 위해서이다. 일반인들은 불변하는 자기동일적 주어에 가변적 속성의 술어를 덧붙인 것으로 사물의 운동과 변화를 이해한다. 즉 승조는 실체론적으로 이해된 운동과 변화에 대한 인식을 거부한다. 일부 비판적 연구가들은 오히려 승조가 실체론적 관점을 가지고서 운동을 부정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이보다는 오히려 철저한 생성적 일원론으로 무상의 개념을 온전히 드러낸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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