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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숭고한 것인가 본문
고통을 숭고의 기원으로 놓았다는 바로 이 점은 버크의 숭고 개념의 특별한 의미임과 동시에 이후 미학사의 숭고 개념 논의에 큰 영향을 미친다. 즉 숭고는 고통에 기원하여 즐거움으로 전이하는 간접적인 감정, 고통과 즐거움이 경계 없이 공속하는 혼합 감정으로서, 숭고 감정의 이러한 이중성에 대한 버크의 설명은 특히 칸트와 쇼펜하우어에게 그대로 수용되어, 미와 구분되는 숭고 감정의 중요 특징으로 간주된다. 또 한편으로 버크는 숭고에 의해 유발되는 부가 감정으로 공포(terror), 경악(astonishment), 경외(reverence) 등을 설명하는데 이러한 숭고의 감정을 유발하는 대상의 속성으로 거대한 규모나 위협이 되는 자연의 힘, 또는 감각적 인식으로 한계를 지각할 수 없는 사물의 무한함과 웅장함을 열거하고 있다. 숭고 개념에서 처음으로 '공포'의 감정이 논의된 것은 영국의 비평가 데니스(John Dennis)에 의해서이다. 그는 숭고에서 불러일으켜 지는 정념에서 가장 강한 것으로 공포를 거론하고, 롱기누스가 숭고의 효과로 지적한 황홀과 놀람을 거대한 것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어 열광적인 기쁨으로 승화되는 복합적인 감정의 측면을 숭고에서 발견한다. 이러한 데니스의 관점을 버크가 수용하여 숭고 체험에서 불러일으켜 지는 감정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였으며, 공포와 기쁨을 포함하는 복합된 감정으로 안도감(delight)이란 개념을 제안한다. 버크는 그 외에도 숭고와 관련된 속성으로 '연속과 균일성', '어둠', '무겁고 어두운 색채', '엄청나게 큰 소리', '갑작스러운 등장', '쓴맛과 악취', '육체적 고통의 촉각 나열한다. 하지만 이러한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속성들을 숭고의 감정과 연결시켜 설명하는 부분은 보편적인 견해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잘 거론되지 않는다.
숭고를 불러일으키는 원천으로써 버크가 제시하는 이러한 사물의 속성들 또한 칸트에게 수용되어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의 개념으로 정립된다. 즉 지각할 수 없는 크기, 웅장한 규모의 사물에서 비롯되는 수학적 숭고와 관찰자의 자기 보존 본능을 위협하고 압도하는 힘으로서의 역학적 숭고가 그것이다. 요컨대, 칸트가 숭고와 미의 중요한 내적 차이로 언급하는 두 가지 면, 즉 숭고한 것에 대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간접적인 작용 관계, 그리고 우리의 판단력에 대해 부적합하게 보일 수 있다는 형식의 면에서 모두 버크와 칸트는 긴밀하게 연결된다. 버크의 탐구는 장대한 문체 형성을 위한 신적인 정신으로 대변되는 롱기누스의 숭고 개념과 달리 숭고의 경험과 관련된 감정에 근거하여 숭고의 근대적 개념을 정립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울러 예술을 고대의 시학적 개념으로부터 독립시켜 순수하게 미학의 대상으로 고찰한다는 점은 순수한 쾌로서의 미, 예술의 개념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미와 숭고의 구분을 강조하고 둘 간의 차이점을 명확한 규정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숭고에 대한 본격적인 이론화 작업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미학사에서 큰 의의가 있다.
숭고에 대한 근대의 재조명은 버크에 의해 본격화되기 시작했지만, 버크의 논의는 숭고를 경험적, 심리적 관점에서 접근했다는 데서 그 한계점을 갖고 있다. 숭고에 대한 보편적 접근은 칸트의 선험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 체계 내에서 미와 숭고가 미적(ästhetisch) 판단의 선험적 원리로 포함되면서 정립되기에 이른다. 칸트의 철학체계의 핵심어인 'transzendental'과 'a priori'의 경우 백종현의 번역서에는 '초월적'과 '선차적'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최근 출간된 한국칸트학회의 '칸트전집'에서는 '선험적', '아프리오리'로 번역하고 있어 혼선이 있는 가운데, 'transzendental'의 경우 지금까지 학계에서 '선험적'을 오랫동안 많이 사용해왔다는 점을 들어 이를 적용하고, 'a priori'는 '선험적'과 구분하기 위해 '선천적'이라는 번역어를 택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본다. 또한 'Verstand'는 백종현의 번역서에서 '지성'으로 표기되며 학계에서도 '오성'과 함께 빈번히 사용되는 번역어이나, '지성'은 일상적 어법으로는 칸트의 '이성(Vernunft)'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오성'이라고 하는 것이 혼선이 없을 것이다. 'asthetisch'에 해당하는 번역은 학계에서 '미적', '미학적', '감성적', '심미적', '미감적'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으나 그 중 '미적'과 '미감적'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 백종현의 번역서에서는 이 단어를 주관의 쾌, 불쾌의 감정과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미감적'이라는 단어를 채택하고 있으나, 학계에서 널리 통용되고 문맥을 파악하는데 있어서도 큰 지장이 없다고 판단되는 '미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칸트는 미적 판단을 통해 이르는 만족, 즉 쾌(Lust)와 불쾌(Unlust)의 원리를 밝혀내고자 했고, 이에 따라 두 가지의 보편적 감정을 정초하는데 이것이 미와 숭고이다. 칸트는 '판단력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에서 미적 판단으로서의 미와 숭고를 분석한다. 미의 분석은 우리가 'x는 아름답다'라고 말할 때 이러한 진술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보편타당한 진술로 판단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분석이며, 숭고의 분석 또한 마찬가지로 'x는 숭고하다'라는 진술의 판단원리에 대한 분석이다. 여기에서 주의해 할 것은, 미에 대한, 또는 숭고에 대한 진술의 분석이, 어떤 대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또는 숭고하게 느끼며 또 어떤 사물, 또는 어떤 속성을 아름다운 것, 숭고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주관적 느낌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 자체, 숭고하다고 부르는 것 자체가 무엇을 말하는지, 그렇게 판단하는 보편적인 원리가 무엇인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