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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적 판단과 주관적 합목적성 본문
미와 숭고의 판단 원리는 무엇일까? 그 원리를 살펴보기 전에 미와 숭고에 대한 진술 판단이 진리 인식에 대한 진술의 논리적 판단과 어떻게 다른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칸트는 판단력 일반의 개념을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는 판단력을 어떤 것을 "규칙들 아래에 포섭하는 능력, 다시 말해 무엇인가가 주어진 규칙 아래에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판단력은 다시 '규정적 판단력(die bestimmende Urteilskraft)'과 '반성적 판단력(die reflektierende Urteilskraft)'의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는데, 칸트는 규정적 판단력을 "보편적인 것이 주어져 있다면, 특수한 것을 그 아래에 포섭하는" 판단력으로, 반성적 판단력은 "특수한 것만이 주어져 있고, 판단력이 그를 위한 보편적인 것을 발견"해야 하는 판단력으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 규정적 판단력은 순수 이성의 구조 안에 이미 오성 일반의 선천적인 범주(Kategorie)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특수한 것을 이 범주 아래에 포섭하기만 하면 된다. 즉 인식주관이 대상을 향해 내리는 판단이 규정적 판단력이다. 이에 반해 주어진 규칙으로 포섭될 수 없는 특수한 것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 주관적 조건 내에서의 반성을 통해서만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반성'에 대해 칸트는 '반성이란 곧바로 대상들에 대한 개념들을 얻기 위해 대상들 자신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개념들에 이를 수 있는 주관적 조건들을 발견하기 위해 우선 준비하는 마음의 상태다. 반성은 주어진 표상들 우리의 서로 다른 인식 원천들과의 관계에 대한 의식으로서, 이를 통해서만 그것들의 상호 관계가 올바르게 규정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대상에 대한 개념을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대상에 대한 보편적인 판단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대상 자체, 물 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며 오로지 대상의 현상, 즉 오성의 선천적 범주 내에서 주어지는 개념의 포섭을 통해 대상을 파악할 수 있으며 판단 또한 가능해지므로, 이러한 오성의 선천적 범주에 근거하여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규정적 판단력과는 달리 반성적 판단력은 대상을 결정할 수 있는 그 자신의 선천적 범주들을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자신에게 주어진 특수한 것에 관여하여 그 특수로부터 고유한 보편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반성적 판단력은 대상으로부터 우리 주관으로 향해 내리는 판단, 즉 대상들의 범주들에 대한 개념적 파악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그 대상이 판단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대상을 판단하는 주관의 보편적 원리가 전제되어야만 할 것이며, 따라서 칸트는 반성적 판단력이 자신에게 속하는 선험적인 원리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칸트는 자연 안에 있는 특수한 것으로부터 보편적인 것으로 올라가야 하는 임무를 갖는 반성적 판단력은 하나의 원리를 필요로 하는바, 반성적 판단력은 이 원리를 경험에서 빌려올 수는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 원리는 바로 모든 경험적 원리들과 마찬가지로 경험적이기는 하나, 보다 고차원적 원리들 아래서의 통일성과 그러므로 그 원리들 상호 간의 체계적 종속관계의 가능성을 기초 지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선험적 원리를 반성적 판단력은 단지 자신에게만 세울 수 있고, 다른 곳에서는 취할 수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규정적 판단력일 거라고 하였다. 때문에 자연에 지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반성적 판단력이 스스로에게 세우는 선험적 원리라는 것은, 대상에 대하여 주관이 인위적으로 원리를 지정한다는 의미가 아닌, 주관의 반성이 따르게 되는 자연의 원리를 말하는 것으로 칸트는 이를 "자연의 합목적성의 원리(das Prinzip der ZweckmaBigkeit der Natur)"라고 말한다. 이처럼 반성적 판단력은 규정적 판단력과는 달리 순수 오성개념과 같은 자신의 특별한 범주를 갖고 있지 않은데, 따라서 반성적 판단력은 경험을 구성하지도, 대상에 관한 지식도 제공하지도 못한다. 다만 그것은 대상을 바라보는데 필요한 인식의 조건, 즉 자연의 합목적적 적합성에 관여하게 된다. 여기에서 자연의 합목적성은 우리로 하여금 산만한 다양성의 자연을 질서가 있는 조화스러운 전체로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는 조건을 말한다. 결국 조화로운 전체로서의 합목적성은 바라보는 대상의 경험과 내용에 있지 않고 그것들을 주관 내에서 합목적적으로 조화롭게 보게 하는 형식에 있다. 다시 말해 반성적 판단력은 대상을 주관의 체계 속에 합목적적으로 정리하는데, 이는 개념을 통해 대상을 규정하거나 그것의 성질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대상의 형식들이 우리에게 반성되는 것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요컨대, 자연의 합목적성은 대상의 내용이 아닌 형식과 우리 주관의 선천적 범주가 아닌 인식 능력과의 합목적적 관계를 말한다. 이러한 대상과 인식 능력간의 형식적, 주관적 합목적적인 관계는 미적 성질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상에 대한 합목적성이 대상 자체의 성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며 대상에서 현상된 표상의 주관적인 면으로서, 대상이 그런 경우 합목적적이라고 불리는 것은, 오로지 그 대상의 표상이 직접적으로 쾌의 감정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표상 자체가 합목적성의 미적 표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적 표상에 대하여 주관의 인식 능력간의 조화와 갈등에 따라 나타나는 미적 만족의 상태가 미와 숭고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