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와 이념은 어떻게 다른가
수학적 숭고가 무한정의 크기와 관련된 판단이라면 역학적 숭고는 위력(Macht)과 강제력(Gewalt)에 관련된다. 위력이란 "커다란 장애들을 압도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으며, 어떤 위력이 다른 위력의 저항을 압도할 때, 그것은 지배하는 힘이며, 이를 강제력이라 말한다. 미적 판단에 있어서 "아무런 강제력도 가지지 않는 위력"으로 간주할 때 이는 "역학적으로 숭고한 것이다." 역학적 숭고는 상상력이 표상하지 못하는 거대한 힘을 마주하게 되면서 발생하는 미적 감정으로서 칸트는 주로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위력적인 힘이라고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는 대자연이 있다. 칸트는 미적 감정을 대자연에 비교하여 기발하게 높이 솟아 마치 위협하는 것 같은 암석, 번개와 천둥소리와 함께 몰려오는 하늘 높이 솟아오른 먹구름, 온통 파괴력을 보이는 화산, 폐허를 남기고 가는 태풍, 파도가 치솟는 끝없는 대양, 힘차게 흘러내리는 높은 폭포와 같은 것들은 우리의 저항하는 능력을 그것의 위력과 비교할 때 보잘것없이 작은 것으로 만든다고 표현하였다.
역학적 숭고의 중요한 특징으로 그것이 공포(Furcht)를 수반하는 쾌라는 점인데, 여기에서 공포의 감정이 쾌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공포가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위협에 의한 것이 아닌 단지 심미적으로만 위협이 되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실제의 위협에 의해 발생하는 공포는 물리적으로 내가 위험에 처하여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의 감정이지만, 심미적인 공포는 위협이 실제적이지는 않지만 그럴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상황의 감정이라 할 수 있다. 즉 위협이 실제의 현실인가, 단지 가능성만으로 존재하는가의 차이다. 이러한 공포의 감정에 관한 서술에서 버크가 말하는 안도감으로 전이되기 위한 조건으로 거론되는 자기보존의 개념과 그 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버크가 이러한 숭고의 체험을 자연법칙이라고 부르고 있는 물리학적 측면에서의 안전과 관련한 안도감의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반해 칸트는 자연에 의한 피 규정성을 넘어서는 인간 정신의 능동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버크가 숭고의 감정을 육체적 생존의 자기보존의 차원에서 정의한다면 칸트는 이러한 생존적 본능을 넘어서는 사유의 힘, 고양된 정신에서 숭고의 본질을 찾는다. 육체적인 존재로서 바라보는 버크의 관점에서라면 인간은 거대한 크기, 압도적인 위력 앞에서의 간단하게 제압될 수 있는 미약한 존재이지만, 칸트에게 인간은 무한한 크기와 상상할 수 없는 위력 앞에서도 이를 이성의 사유 안에서 무제약자의 이념 아래 포섭할 수 있는 척도를 지니고 있는, 자연을 넘어서는 우월한 존재이다. 칸트는 수학적, 역학적 숭고 개념을 통해 인간 이성의 초월성을 미적 판단의 차원으로 끌어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숭고는 무한정적인 형식에 의해 자극받지만 그것은 대상 자체가 가진 속성이 아닌, 그것을 판단하는 주관의 미적 판단에 속하는 감정이다. 다시 말해 이성의 이념들과의 관련을 통해서 합목적적인 판단에 이르는 좀 더 관념적이고 정신적인 만족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숭고 체험을 통한 정신적 고양을 두 가지 개념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현시할 수 없는 것의 현시(Darstellung des Undarstellbaren) 또는 부정적 현시(negative Darstellung)와 무제약자로서의 이념(Idee)이다.
칸트에게서 숭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거론되는 자연의 무한한 크기(수학적 숭고의 대상)와 압도적인 위력(역학적 숭고의 대상)은 반목적적인 형식으로 조화롭게 체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성적인 형식으로는 현시될 수 없는 몰형식의 표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상이 주관에 의해 합목적적으로 판단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두려움과 공포로 그칠 뿐, 미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때 현시될 수 없는 대상을 현시하게 하는 주관의 능력이 이성이며, 합목적적 판단을 이끌어내는 개념이 무제약자의 이념이다.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가는 대상의 무한한 크기와 힘이 이성에 의해 감성적 형식을 넘어서는 무제약자로서의 이념의 크기와 힘으로 포섭될 때, 다시 말해 현시될 수 없는 초감성적 형식의 표상을 이성의 이념에 의해 마치 감성적으로 현시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을 때, 인간을 압도하는 무한적의 크기와 힘은 비로소 숭고의 감정으로 체험될 수 있다. 즉 대상의 무한한 표상은 이러한 초감성적인 이념에 의해서만 합목적적이 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상상력의 한계에서 오는 불쾌가 쾌의 감정으로 불러일으켜 질 수 있는 것이다. 무한한 표상에 대해 칸트는 "이성의 이념들은 그에(감성적 형식) 적합한 현시가 가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감성적으로 현시되는 바로 이 부적합성을 통해 환기되고 마음속으로 불러들여 진다. 그렇기에 폭풍우로 파도가 높은 대양은 숭고하다고 부를 수 없다. 그 광경은 무섭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봄에 의해 마음이 감성을 떠나도록 그리고 더욱 높은 합목적성을 함유하고 있는 이념들에 몰두하도록 자극받음으로써 그 자신 숭고한 감정에 젖어 들려면, 사람들은 마음을 이미 여러 가지 이념들로 가득 채워놓았어야만 한다 설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