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 현시(negative Darstellung)와 이념
본래 초 감성적인 이념이란 현시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상에 속하는 인간의 언어와 개념에 의해 포착될 수 없는 무한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초감성적 이념은 제약의 전체성을 표상하는 순수 이성의 개념으로 경험이 가능한 대상들은 제약의 전체성 아래에서 감성적인 형식을 부여받게 된다. 경험의 대상이 되는 모든 제약자는 체계적으로 상위 제약자에 제약되어 있으며 제약자의 상위 제약자를 계속 상정하게 되면 결국 제약자의 가장 높은 곳에 어떤 무제약자가 있음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무제약자를 찾는 것이 이성에게 주어진 과제로 부여된다. 이러한 요구 때문에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제약자 전체 체계를 통일하는 개념으로 순수 이성의 이념을 제안하는 것이다. 상상력의 한계를 넘는 초감성적 형식으로 현시될 수 없는 표상을 현시할 수 있도록 포착하는 이성의 이념이란 바로 제약자를 포괄하는 순수 이성의 개념, 즉 무제약자의 이념이다. 따라서 거꾸로 말하자면, 무제약자의 이념은 상상력이 대상을 현시할 수 없는, 부정적 현시의 한계를 통해서만 오히려 일깨워질 수 있다. 이 부정적 현시의 한계는 숭고의 감정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개념인데, 칸트는 부정적 현시의 표현과 관련하여 "이보다 더 숭고한 문구는 없을 것이며, 또한 어떤 사유도 이보다 더 숭고하게 표현된 일도 없었을 것"으로서 '이시스(Isis) 여신의 신전'에 씌여진 문구를 예로 들고 있다. 이시스는 'Isis' 또는 'Ise(t)'라고 불리는 고대 이집트의 여신이다. 이집트인들은 이시스를 '사랑의 여신', '바다의 여신', '신의 어머니', '태양의 어머니'로 숭배하였으며, 이 여신에게 자식들의 가호를 빌었다. 이시스는 또한 모든 비밀과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아는 마술사로도 여겨져, 어느 신보다도 현명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랑의 여신이자 신의 어머니라 불렀던 이시스의 신전에는 "나는 현존하며, 현존했으며, 현존하게 될 모든 것이니, 죽을 수밖에 없는 어떠한 자도 나의 베일을 벗겨본 일이 없노라"라고 씌여진 문구가 있다. 이 문구에 대해 칸트는 규정적인 개념을 통해서는 적합하게 표현할 수 없는 부정적 현시를 통한 숭고의 감정을 시적인 문구를 통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감성적인 현상의 형식을 넘어서는 부정적 현시를 예술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현시할 수 없는 이념을 현시하고자 하는 것은 헛되지만, 베일을 벗길 수 없다는 유한성을 자각하더라도 베일이라는 감성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이성의 초월성은 미적으로 숭고하다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이성의 숭고함 속에서 인간은 정신의 확장과 고양을 경험할 수 있다.
숭고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감성적인 형식으로는 표상할 수 없는 상상력의 무능력과 한계에 대해서, 이성적인 사유 그리고 이념이 감성적인 것들보다 더 우월하다는 사실에 대한 환기에서 오는 감정이며, 이러한 숭고의 체험은 정신의 능동성과 확장을 자극한다. 정신의 능동성과 확장 자극에 대해 칸트는 "우리가 이러한 대상들을 기꺼이 숭고하다고 부르는 것은, 그것들이 영혼의 힘을 일상적인 보통 수준 이상으로 높여주고, 우리고 하여금 자연의 외견상의 절대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저항하는 능력을 우리 안에 들춰내 주기 때문이다."라고 표현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숭고를 정신의 능력으로 또는 저항의 힘으로 읽어낼 수도 있다. 숭고의 체험은 무한과 위력의 표상에 대한 상상력의 무능과 감성적 존재로서의 한계에 대해 굴복하지 않는 이성의 자각이며 저항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한계에 대한 좌절과 절망이 오히려 정신의 고양에 이르게 하는 계기가 되며, 그렇기 때문에 숭고의 체험은 감성적 존재로서의 좌절의 크기를 이성적 존재가 지녀야 할 정신의 크기로 도약하게 하는 힘이 된다. 그러한 점에서 숭고는 저항의 힘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절망이 있는 곳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는 비극적인 면을 포함하고 있다. 즉 인간이 자신의 감성적 한계에 좌절하는 절망 자체가 인간 정신의 숭고한 자각이며 이를 극복하려는 이성의 이념이 숭고함의 표현인 것이다. 숭고는 비극의 절망 가운데서 피어나는 정신의 고양이며, 스스로 자각하는 유한성에 저항하여 발현되는 확장된 사유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