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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적 숭고와 쇼펜하우어적 표상세계

k지니 2021. 6. 28. 10:11

이처럼 도덕적 감정과 숭고의 감정은 감성적 형식에 대한 이성의 지배 때문에 불러일으켜 지는 만족감이라는 점에서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감성에 대해 이성이 행사되는 방식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 즉 사유방식에 있어 자유성, 다시 말해 감각적 향락에 대한 만족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전제하고 그것을 교화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데도 숭고에 의해서는 법칙적인 과업에서의 자유라기보다는 유희에서의 자유가 표상된다. 즉, 이성이 감성에 대해 강제력을 행사한다는 것에서는 공통되지만, 숭고한 것에 대한 미적 판단은 도덕성의 고유한 성질인 법칙에 따르는 활동이 아닌 이성의 도구로서의 상상력 자신에 의해 행사되는 자유의 활동이라는 면에서 다르다. 감성에 대한 이성의 제어라는 면에서 도덕감과 숭고감은 유사한 만족의 원리로 연관되어 있으며 문화적 도야를 통한 이성의 이념에 대한 사유를 요구한다는 면에서 모두 고양된 감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숭고에 대한 경험은 이성 이념을 불러오도록 강제함으로써 도덕성의 고양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것은 자연보다도 우월한 우리 안의 이성의 합목적성에 대한 경외감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합목적적인 지고의 법칙인 도덕적 선은 미적으로 판단하면 아름답다기보다는 오히려 숭고하다고 표상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래서 그것은 사랑의 친밀한 애호의 감정이라기보다는 존경의 감정을 일깨우는 것이다.

하지만 칸트가 한 사람의 미적인 성향과 도덕적 성향, 또는 미적 감정과 도덕적 감정을 유사한 것으로, 간접적으로만 연관 짓고 있다는 점에서 미적 판단의 도덕적 판단으로의 완전한 이행을 설명하기에 모호하고 불충분하다는 지적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러한 모호함은 칸트 스스로의 언급에서도 나타나는데 둘 간의 연관에 대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단적으로 좋은 것은 물론 그 자체로는 미적 판단에 속하지 않고, 순수한 이성적 판단에 속하며, 또한 반성적 판단에서가 아닌 규정적인 판단에서, 자연이 아니라 자유에 부여되는 것이다"라고 단정하고 있는데서 칸트는 미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의 영역을 구분한다. 미적 감정과 도덕적 감정의 연관에 대해서 칸트는 미를 '도덕성의 상징' 으로서 설명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한다. 미가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것, 즉 미적 이념이 도덕성에 기초한 이념이라는 것이다. 미의 경험은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원리를 초감성적으로 스스로 입법한 결과이기 때문에, 인간에 의해 입법되는 최고의 법칙이 도덕 법칙이므로, 미는 도덕성의 토대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입법한 결과는 우리가 경험하는 감성적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서 미와 숭고는 도덕성의 토대를 상징한다.

요컨대, 자연에 대하여 상상력과 오성의 조화로운 쾌를 경험하는 미와 달리 숭고는 무한한 자연 앞에서 적대적으로 세워진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고 이성의 사유를 통해 그것을 합목적적으로 포섭하도록 한다. 이 가운데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일깨움이 동반되는데, 즉 외적인 자연 대상은 우리의 상상력에는 반목적적이지만 우리의 내적인 능력, 즉 실천이성, 도덕적 추론에 종사하는 능력에 대해 목적에 부합하는 것으로 판명된다. 이처럼 칸트에게 숭고의 감정은 무한한 것처럼 보이는 자연 앞에 선 인간을 이성의 이념에 대한 사유로, 그리고 지고한 법칙으로서 도덕적 감정으로 고양하는 미적 경험이라는 데서 그 도덕적 토대를 가진다.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은 '의지 형이상학'으로 명명되는 형이상학 체계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예술에 부여된 형이상학적 가치 또한 세계의 본질을 의지로 바라보는 그의 철학적 진리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에 관한 논의는 필수적으로 의지 형이상학에 기반한 이해를 요구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세계를 표상과 의지로 설명한다.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인식의 세계이며 의지로서의 세계는 존재의 세계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Die Welt is meine Vorstellung)"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나의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의미하는 바는, 내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란 "표상하는 자와 관계함으로써만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표상 세계란, 주관에 의해 인식된 세계이며, 여기서 세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의 존재는 오로지 인식하는 의식을 위한 존재, 즉 표상 세계에서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세계는 나의 표상"이라는 문장을 전제할 수 있게 하는 인식의 선험적 원리를 두 가지 측면에서 들고 있는데, 첫째 표상 세계는 근거율 또는 충분근거율(der Satz vom zureichenden Grunde)의 형식으로 인식된다는 것과 둘째, 충분근거율은 주관과 객관의 공통된 형식이라는 것이다. 사실, 근거율, 충분근거율, 이유율, 충족이유율, 충족근거율, 충분이유율은 모두 같은 원어(der Satz vom zureichenden Grunde)의 번역이다. 원어에 가장 근접한 번역은 '충분근거율'이라고 생각한다. 근거율은 라이프니츠에 의해 모든 인식과 학문의 핵심원칙으로서 공식적으로 주장되었으며 그것은 "모든 것은 왜 그것이 그렇고 다르지 않은가에 대한 하나의 충분한 근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라이프니츠의 충분근거율에 관한 논의를 비판하는데, 충분근거율이 존재의 원인이 아니라 인식근거의 관점에서, 즉 칸트의 말에 따르자면 물 자체가 아닌 주관의 선험적 인식형식으로서 충분근거율이 적용되어야 함을 주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