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충분근거율이란
충분 근거율은 주관의 선험적 인식 형식으로, 주관에 의해 인식된 객관은 충분 근거율에 의해 결합된 표상의 구성물이며 따라서 객관 또한 충분 근거율의 형식 하에 놓이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충분 근거율에 대해 논한 그의 논문 '충분 근거율의 네 가지 뿌리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우리의 모든 표상은 주관의 객관이고, 주관의 모든 객관은 우리의 표상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모든 표상은, 형식에 있어서 합법칙적이며 선험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결합 안에 서로 뒤섞여서 놓여 있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이 결합에 의해 어떤 것도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거나 독립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개별적으로 분리된 어떤 것도 우리에게 객관이 될 수 없다. 이 결합은 충분 근거율이 보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표현하며 언급하였다.
쇼펜하우어의 언급에 따르면, 충분 근거율은 주관의 선험적 인식 형식이므로 주관에 의해 인식된 객관 또한 충분 근거율의 형식에 놓이게 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주관은 세계의 담당자이며, 현상하는 모든 것과 객관을 관통하며 항시 그 전제가 되는 조건이다." 따라서, 주관은 객관의 전제가 되며 객관은 오직 주관에 대해서만 존재한다. 즉 주관 없는 객관은 없으며 객관은 주관의 선험적 형식에 종속된다. 그 선험적 형식이 곧 충분 근거율이며 이것으로 주관과 객관의 세계는 맞닿아 있다.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인식론적 관점 즉, 주관이 인식하는 객관이라는 세계를 주관의 선험적 인식 형식에 근거하여 파악하고 따라서 객관이 주관에 의해 구성된 표상 세계라는 것, 그리고 주관에 의해 인식된 객관과 그것과 무관한 형식으로 존재하는 물 자체(Ding an sich)를 구분하는 관점은 칸트의 인식론적 전제를 그대로 계승한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우리의 의식 속에 시간과 공간이라는 감성 형식이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음을 발견한 것이 칸트의 가장 위대한 공적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오성에 의한 반성적 판단의 근거가 되는 선험적 범주에 대해서는 다르게 접근한다. 칸트는 선험적인 감성 형식으로서 시간을 내감의 형식, 공간을 외감의 감성 형식이라 말하고 오성에 의한 판단의 범주를 12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칸트는 판단의 범주를 양, 질, 관계, 양태의 4가지 항으로 구분되며, 각 항별로 3가지 하위 항목을 둠으로써 12가지 범주로 구성하였다. 이 중 인과성은 대상 간의 관계에서 가언판단, 즉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판단하는 판단 범주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에 반해,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오성의 판단 범주를 직관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점에서 비판하며 결과에 대한 원인을 근거 짓는 인식 형식으로서의 인과율만을 인정하고 모두 거부한다. 결과적으로 쇼펜하우어는 선험적 인식 형식으로서 시간, 공간, 인과율의 세 가지 형태만을 제시하고 이를 주관과 객관의 공통 형식이자 표상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가 되는 형식으로서 충분 근거율이라 칭한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객관의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형식들인 시간, 공간 및 인과율은 객관 그 자체를 인식하지 않고도 주관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되고 완벽하게 인식될 수 있다는 데서, 즉 칸트의 말을 빌리면 우리의 의식 속에 선험적으로 존재한다는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의 설명에 따라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칸트가 말하는 현상의 세계이며, 주관이 물 자체를 인식할 수 없듯이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도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란 오직 충분 근거율에 의해 인식된 객관, 즉 표상의 세계뿐이다. 하지만 또한 쇼펜하우어는 표상 세계 한계 너머의 본질 세계에 대한 접근 가능성을 열어두며 "이 세계는 단지 표상에 불과한가?" 또는 "어떤 경우에 표상이 실체 없는 몽상이나 또는 유령 같은 환영처럼 우리 곁을 슬쩍 지나가 우리의 주목을 받을 가치가 없는 것인가?" 또는 "세계가 뭔가 다른 것, 그 외의 뭔가 다른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라며 몇 가지 질문을 하였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인간의 신체에서 찾는다. 인식 주관에 의해 파악되는 외부로 가장된 객관이 아닌 보다 직접적인 객관인 신체를 매개로 해서 표상과는 다른, 표상이 아닌 본질의 세계로 다가가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