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이데아와 쇼펜하우어의 이념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객관화 단계마다 개체화의 원리, 즉 시간, 공간, 인과율의 법칙에 종속되지 않은 사물의 영원한 형상(ewige Form)이 있다고 말한다. 일부 번역서에는 '영원한 형식'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플라톤의 이데아를 지칭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 'eidos'의 번역어인 '형상'이 개념적으로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개체의 영원한 형상, 모범은 의지가 가장 순수하고 완전하게, 즉 적합한 방식으로 객관화된 것으로, 쇼펜하우어는 이를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을 차용해 '이념(Idee)'이라 칭한다. 쇼펜하우어의 이념은 의지의 적합한 객관화로서 의지와 표상 세계를 매개하는 역할뿐 아니라 미적 인식의 대상이 되는 사물의 모범적 상으로서 예술철학 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개념이다.
쇼펜하우어의 이념과 개체의 관계는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와 사물 간의 관계, 즉 모범(Musterbilder)과 모사(Nachbilder)의 관계로서 유비적이다. 즉 이데아는 사물의 변화하는 외연이 아닌 불변하는 본질이며 개별자가 아닌 유(類) 전체의 보편적인 상으로서 사물의 원형(Urbild)이 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모범이라는 의미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와 이념을 동일한 개념으로 간주하며, "의지의 객관화의 이 같은 단계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다. 나는 앞으로 이념이라는 말을 이 의미로 사용할 것"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이념은 의지와 표상 세계 사이를 매개하는 역할로서, 그림자가 아닌 참의 세계로서 우위를 가지는 플라톤의 이데아와는 존재론적 차이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쇼펜하우어의 이념은 인식론적 관점에서는 사물의 보편 형식, 모범으로서 플라톤의 이데아와 동일시될 수 있는데 반해, 존재론적 관점에서 이념과 이데아가 동일한 존재론적 위치를 가지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상이한 대답으로 의견이 분분하다. 공병혜는 쇼펜하우어의 이념이 "사물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원형이지만, 현상의 배후에 실재하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이미 주관의 표상의 세계 속에서 객관화된 보편적 이념이기 때문에 플라톤의 이데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 주장한다. 공병혜의 이러한 주장은 쇼펜하우어의 이념이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현상의 배후에 실재하는 객관적 실체가 아님을 지적한다는 면에서 이념과 이데아 간의 존재론적 차이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념을 이미 주관의 표상의 세계 속에서 객관화된 보편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이념의 위치를 주관의 표상 세계에 속한 것으로 전제한다는 점에서 또한 의문이 제기된다. 그리고 "이념은 물 자체로서의 의지에 대한 가장 적합한 객체성으로서 이미 주관을 위한 직관적인 표상인 것이다."라는 단언에서도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표상과 의지 사이에 존재하는 이념의 위치와는 다르게 해석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물 자체와 현상하는 사물 사이에는 의지의 유일한 직접적인 객관성(unmittelbare Objektivitat)으로서 이념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념은 의지의 세계와 표상의 세계 사이에 존재하며 이러한 이념의 매개적 위치로 인해 의지의 직접적인 객관화가 가능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윅스(Wicks)는 플라톤의 이데아가 쇼펜하우어의 이념보다는 오히려 의지에 비견될 수 있으며, 무시간적이고 단일한 보편적 성질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의지에 더 가까운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변화하는 개별 사물의 근거로서 배후에 존재하는 영원한 보편적 실체로서의 이데아와 근거율에 종속된 개체의 다수성을 벗어나 있으며 시공간에 구속되지 않은 단일한 본질로서의 의지는, 존재론적인 관점에서는 이데아-이념보다는 더욱더 가까운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데아의 세계는 불변하지만 전체가 같은 성질을 가지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며 서로 다른 많은 이데아들이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다수성을 벗어난 단일한 존재로서의 의지와는 전혀 다른 존재 방식을 가진다. 또한 이데아가 개별 사물에 관계하는 방식과 의지가 표상 세계에 관계하는 방식 또한 전혀 다른데, 다수의 이데아는 다수의 사물에 자신의 완전성을 분유함으로써 관계하는 데 반해, 의지는 단일하므로 표상 세계에 개별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며 단지 의지는 근거율에 의하여 객관화하는 방식으로 개체로 드러날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쇼펜하우어는 떡갈나무의 예를 들어 이렇게 설명한다. "의지는 수백만의 떡갈나무에 그러한 것처럼, 하나의 떡갈나무에도 같은 정도로 완전하게 의지는 자신을 드러낸다. 떡갈나무의 수, 즉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의지의 다양화는 의지와 관련해서는 아무 의미가 없고,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인식하고 스스로 그 속에서 늘어나고 흩어진 개체들의 다수성과 관련해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의지는 개별 개체에 참여하거나 분유함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의지는 단일하므로 스스로를 완전하게 모든 개체에 동일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세계의 본질인 존재로서 플라톤의 이데아와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동일한 존재론적 위치에 있지만, 전혀 다른 존재 방식과 전혀 다른 개체와의 관계 방식을 가진다는 면에서 차이를 갖는다. 또한 결정적으로는 개체의 모범이 되는 형식으로서의 이데아의 역할과 의지는 전혀 무관하므로 쇼펜하우어가 플라톤의 이데아를 이념과 동일시한 맥락에서의 의미가 훼손된다는 면에서 이러한 주장은 문제점을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