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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이념적 해석이 계속되는 이유

k지니 2021. 7. 1. 08:19

쇼펜하우어가 이데아와 이념의 동일성을 단언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혼선과 상이한 해석이 계속되는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쇼펜하우어가 플라톤의 이데아를 오해 또는 곡해하고 있다는 측면이다.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언급하면서 "필연적으로 객관, 인식된 것, 즉 하나의 표상이며,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또한 그렇기 때문에만 물 자체와 상이하다. 언급하고 있는데, 이데아를 "물 자체와 상이한", "하나의 표상"으로 지칭하는 것은, 그 자체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언급은 애초에 플라톤이 이데아를 참된 세계로 상정한 의미와는 상반되기 때문이다. 또한 "의지의 객관화의 특정한 단계를 플라톤이 영원한 이데아 또는 변함없는 형상으로 부른 것으로 생각해 주기를 희망"한다고 말함으로써, 플라톤의 이데아의 용어를 빌려와 의지의 완전한 객관화로서 이념의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이데아의 의미를 플라톤이 말하는 참의 세계, 즉 칸트가 말하는 바의 주관 밖의 물 자체의 세계라는 존재론적인 의미가 아닌, 변화하는 개별 사물의 영원한 형상으로서 모범이 되는 역할이라는 면에서만 그 의미를 차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즉 개별 사물에 대한 이데아의 역할과 개체의 표상에 대한 이념의 모범으로서의 역할만이 유비적으로 동일하며, 플라톤의 철학 내에서 이데아와 쇼펜하우어의 의지 형이상학 내에서의 이념은 전혀 다른 존재론적 의미를 가진다고 해석할 수 있다.

두 번째 측면은, 플라톤의 이데아와는 다른 쇼펜하우어의 이념의 존재론적 역할, 즉 의지와 표상 간의 매개의 역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쇼펜하우어의 이념이 가진 이데아와의 차이점과 그 자체로서의 모호한 위치로 인해 또한 문제가 제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객관화에서 이념의 역할을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근거율에 따라서 현상하는 개별적 사물은 물 자체(즉, 의지)의 간접적인 객관화에 지나지 않고, 이 물 자체와 현상하는 사물 사이에는 의지의 유일한 직접적인 객관성으로서 이념이 존재한다. 이는 이념이 표상 일반의 형식, 고유한 형식(근거율)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념은 의지의 직접적인 객관화로 개별 표상과 의지를 매개하는 역할로 언급되는데, 문제가 되는 점은 이념이 의지의 객관화, 즉 다수로서의 개체화에 관계하지만 개체화의 원리인 근거율과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때에 드러나는 모호한 점은 표상과 이념 모두 의지의 객관화이지만, 개별 표상은 근거율에 의한 간접적인 객관화인 반면 이념은 근거율과 무관한 의지의 직접적 객관화이면서도 동시에 다수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이념은 다수의 표상과 관계하는 다수의 모범이지만, 시공간과는 무관한 단일의 의지를 매개한다. 여기에서 이념은 전혀 다른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는 두 세계를 매개한다는 역할에서의 난점을 가지며 시간과 공간의 근거율과 무관하지만 다수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모순을 가진다. 플라톤은 이데아와 개별 사물 간 관계의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이데아가 개별 사물들에 분유한다는 원리로 설명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단일한 의지가 다수의 개체에 분화하거나 참여하지 않으며, "개체의 다수성 자체는 의지가 아닌 의지의 현상에 관계할 뿐"이라고 말함으로써 두 세계의 원리를 단절시킨다.

이러한 이념의 난점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논의와 해석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념과 표상의 관계를, 사물의 영원한 형상으로서의 모범과 이를 모방한 모사와의 관계로서 유비적으로 바라보는 인식론적 관점에서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쇼펜하우어의 이념을 동일시하여 간주할 수 있다고 보고, 이러한 관점만으로도 미학적 논의에는 큰 문제가 없으리라 판단한다. 이와 관련한 쇼펜하우어의 언급을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해 본다면, 이념이라고 하는 것은, 의지가 물 자체이며 그 때문에 다수성과는 무관한 한에서 의지의 객관화의 각기 특정한 고정된 여러 단계를 말한다. 개별적 사물에 대한 이들 이념들의 단계의 관계는 물론 그들 사물의 영원한 형상이나 모범에 대한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념을 플라톤의 이데아와 동일하게 간주하지만, 칸트가 말하는 이념과는 분명한 선을 긋는다. 쇼펜하우어는 이념을 "스콜라 철학이 독단적으로 말하는 이성의 추상적 산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데, 칸트는 그러한 이념을 지칭함에 있어 플라톤이 이미 소유했고 지극히 합목적적으로 사용한 단어를 부당하고 부적절하게 잘못 사용한 것이다."라며 칸트를 비판한다. 칸트가 이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물론, 플라톤의 이데아를 염두에 둔 것이며 이에 관해서는 칸트 스스로도 언급한 바 있다. 칸트는 순수 오성이 산출한 개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 개념에서 빌어 왔듯이 "순수 이성의 개념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어 그것들을 선험적 이념들이라고 부른다 언급하면서 이 용어의 출처를 플라톤의 이데아로 밝힌다. 그리고 플라톤의 이데아가 "감관들로부터는 빌려올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다루었던 오성의 개념들조차도 훨씬 뛰어넘어가는, 그러니까 경험 중에는 결코 그것에 상응하는 것을 만나지 않는 그런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면에서 자신의 이념과의 개념적 연관성을 드러낸다. 칸트는 일반적 표상의 종합으로서 순수 오성의 개념들을 범주(Kategorie)라 칭하며, "이 개념을 아리스토텔레스를 좇아 범주들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언급한다. 하지만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가 아무런 원리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개념들을 부딪치는 대로 긁어모아 몇몇 순수 감성의 양태들을 비롯하여 경험적 개념이 들어있는 결함을 가진다고 비판한다. 즉 칸트는 경험에 속하지 않은 순수 오성의 개념들의 목록이라는, 범주에 부여한 엄밀한 의미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 개념을 비판하면서, 용어가 포함하는 의미와 원리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