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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식주관의 관조

k지니 2021. 7. 4. 08:32

뫼부스(Mobub)는 의지를 부정하고자 하는 의욕 자체도 의지의 표현이 아닌가? 하고 자문하며 이에 대하여, "의지의 부정은 인식의 결과이지 그것의 의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의도적으로 계획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행위로서 내적인 필연성으로부터 인간을 자유에로 초대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다. 비른바허(Birnbacher) 또한 의지 부정을 주관의 내적 상태로 해석하는데, 그는 의지 부정을 의지의 약화나 제거를 의미하지 않으며 에피쿠로스의 아타락시아(ataraxia)에서 말하는 내면의 평정과도 같은 상태라고 주장한다. 의지 부정이 주관이 이르게 되는 인식의 결과이지 의도가 아니라는 뫼부스의 언급은 의지 부정 자체를 또 다른 의지의 발현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측면에서 적절한 지적이긴 하지만, 의지 부정을 내면적인 자유 또는 평정과 같은 심적 상태로 이해하는 것은 자칫 의지 부정을 내면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으로 전도될 우려가 있다. 한편, 김미영은 의지 부정이 경험세계를 이끄는 필연성인 자연을 부정하는 신비적인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쇼펜하우어의 의지 부정은 근거율에 의해 인식된 표상 세계의 실재성을 부정할 뿐, 자연으로서의 의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의지 부정은 주관 앞에 놓인 자연을 환영으로 거부하는 신비주의적 인식이 아니라 모든 인간과 사물에게 공통적인 자연 의지를 인정하는 본질적 인식에서 비롯된다. 또 한편으로 하피터는 의지의 부정을 수도자 또는 성인과 같은 금욕주의적 삶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하면서 신체에서 비롯되는 감각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쾌락적 활동의 금지를 역설한다. 이러한 금욕적 삶에 대해서는 쇼펜하우어도 윤리에 관한 논의에서 대안적인 삶의 형태로서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의지 부정을 금욕과 고행의 실천적 삶의 형태로만 논하는 것은 세계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라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축소할 우려가 있다.

이러한 지적들에서처럼, 의지 부정을 개체의 소멸이나, 신체적 또는 심리적 욕구의 억제와 제거와 같은 생리학적, 심리학적 의미로 받아들이거나 신비주의적 세계로의 초월, 금욕적 삶의 형태로만 해석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의지 부정은 자신과 세계의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의 획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형이상학적 인식이 이성적 사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윅스(Wicks)는 의지의 부정이 이성의 반성적 사고를 통해 의지를 부정하기를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며, 주관이 의지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의지가 발현하는 경험적인 성격의 고정성이 무너지며 욕망이 스스로 침묵하는 특수한 상황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지의 부정은 "의지가 자신에 대한 인식에 도달한 후, 자신의 발현 내에서 (살려는 의지의 부정으로서) 자신과 등지게 되는 상황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의지 부정이 주관이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의지의 객관화로서의 주관이 스스로를 의지의 발현으로서, 혹은 의지 그 자체임을 인식하면서 스스로가 더 이상 개체로서의 주관이 아닌 보편으로서의 인식에 도달하는 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의지 부정에 따른 순수인식주관의 상태는 개체로서의 주관의 인식을 벗어남으로써 근거율에 의해 표상을 결합한 세계로서의 객관 또한 사라지는 형이상학적 상상의 요청되는 인식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게 의지 부정은 주관이 의지에 맞서 거부하거나 분리한다는 논리적 대결의 개념이 아닌, 의지의 자기 인식이라는 관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주관이 스스로를 의지로서 깨닫는 인식을 통해 비로소 의지로부터 벗어난 인식에 이를 수 있으며, 이러한 인식에 이른 주관, 즉 더 이상 개체가 아닌 주관을 순수주관이라 부를 수 있다. 여기에서 더 이상 개체가 아닌 주관이란 대상을 인식하는 내가 의지의 객관화이며 따라서 의지의 한 사태일 뿐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내가 인식 주관이 아니라 단순한 맹목적 의지에 불과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인식 주관인 내가 없으면 인식된 사물은 객관이 아니라 단순한 의지이자 맹목적 충동"으로서, 인식 주관인 나와 인식된 사물은 의지로서 하나이며 이러한 "의지는 즉자적으로 표상의 밖에서 내 의지와 동일하다." 이처럼 대상과 나를 동일한 의지로서 자각하는 것은 "자신이 그 주관으로서 세계와 모든 객관적인 현존의 조건, 즉 담당자임을 직접 깨닫게" 되는 그러한 자각이다. 여기서 주관은 객관화된 개체의 원리에서 벗어나 의지의 담당자로서 자신을 자각하면서 이제 자신의 개체성을 망각하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스스로도 순수인식주관에 대한 비판을 미리 염두하면서, 비난에서 벗어나기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이러한 점을 의식하여 비유를 들어 순수인식주관에 관한 설명을 하는데, 주관 밖의 주관, 또는 더 이상 개체가 아닌 주관이라는 의미에서, 객관을 비추는 맑은 거울을 들어 설명한다. 또한 인식하는 자도 인식된 것도 없는 시간과 공간, 인과율의 인식법칙이 사라진 대상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단지 세계를 보는 하나의 눈, 즉 '세계눈(Weltauge)'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 즉 시간과 공간에 의해 인식하는 개체성을 벗어난 주관, 즉 지금, 여기, 나를 떠나 대상과 나의 구분이 사라진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된 세계라는 것은 그 자체로 근거율에 종속된 이성적 사유방식으로 파악하기란 여전히 어렵다. 쇼펜하우어는 순수주관에 의해 조망된 형이상학적 세계를 개념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데 한계를 느끼고 개념보다는 은유, 논리보다는 시적 언어를 차용함으로써 순수주관의 인식을 설명하고자 시도한다. '세계눈'이나 '맑은 거울'이 그러한 은유에 해당할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인도의 고서 "우파니샤드"를 인용하여 언어적 한계를 넘어 설명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