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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감과 숭고

k지니 2021. 7. 7. 07:46

의지의 진정으로서의 예술 개념에 내포된 고통의 체념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미적 관조를 통해 의지가 진정되는 순간을 맞는다는 것은 고통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의지의 진정은 삶이 곧 고통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체념하는 관조적 시선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쇼펜하우어가 표현하는 예술의 구원이라는 의미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고통에 대한 체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체념의 인식을 삶의 패배적 태도로 비판하며 삶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의 철학을 제시하기도 한다. 박찬국은 쇼펜하우어가 인간을 욕망의 존재로만 바라본다는 점을 비판하며 삶의 고통은 욕망의 좌절에서만 오는 것이 아닌 의미 있는 삶에 실패하는 데서 비롯되기도 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따라서 고통의 회피와 체념이 아닌 이성적 잠재력의 구현과 사랑과 같은 삶의 가치를 제안하며,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쇼펜하우어와 다른 형이상학의 탐색을 제안한다. 또한 정낙림은 "예술의 목적은 삶에 대한 형이상학적 정당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과 고통 그 자체를 긍정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이때 예술은 반종교적, 반형이상학적 입장을 견지"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는 기존의 철학과 가치에 대한 전복을 통해 삶에서의 예술의 가치 또한 삶의 긍정과 찬양에 귀속시키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는, 쇼펜하우어가 예술에 부과하는 목적이 궁극적으로 삶 자체에 대한 긍정과 위안에 있지 않고 이념의 조망에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체념을 통한 고통의 진정은 쇼펜하우어가 예술에 기대한 역할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자체를 예술의 목적이라 볼 수는 없다. 그러한 진정은 삶의 이념을 관조하는 데서 비롯되는 결과적 태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술에 기대하는 역할을 체념이 아닌 찬양, 부정이 아닌 긍정에 두는 관점은 가치론적 해석으로서, 예술을 이념 조망의 영역으로 다루는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적 해석과는 관점을 달리한다. 쇼펜하우어가 예술에 부여한 의지의 진정의 미가 가진 이러한 한계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충분 근거율에 종속된 표상 세계와는 다른 인식의 계기가 되며 의지에 지배된 삶의 고통을 일시적이지만 위안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면에서, 의미 있는 체험이 되어 줄 수 있다. 또한 예술작품을 통한 미적 경험의 반복은 자기 보존의 목적을 위한 도구적 관계 속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넘어 사물의 본질, 즉 전체 세계를 향해 마음의 심정을 넓히는 삶의 습관을 쌓게 한다는 면에서 예술 이상의 철학함으로써의 의미 또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미감이란 순수인식주관이 미적 관조에 이를 때의 감정이며, 이념으로서 조망된 대상의 모습이 아름다움, 즉 '미(das Schone)'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아름다움으로써 만족하는 체험에 이른다는 것은, 대상과 마주함에 있어 개체로서의 대상이 아닌 대상의 보편적 형상으로서의 이념을 관조하는 순수 인식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숭고의 체험 또한 이념의 관조에 다다르는 인식을 통해 가능하지만 그 과정에 있어 미의 감정과는 다른 정신적 작용을 거쳐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미와는 다른 숭고의 정신적 작용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아름다움의 경우는 순수한 인식 작용이 투쟁 없이 우위를 차지한다. 반면 숭고함의 경우에는 불리한 것으로 인식된 의지에 대한 동일한 객관의 관계들로부터 의식적이고도 억지로 이탈함으로써, 즉 의지와 그것에 관계하는 인식으로부터 의식을 동반한 자유로운 고양을 통해 비로소 처음으로 순수한 인식 상태가 얻어진다. 말하자면 관조된 객관의 의지 일반에 대한 적대 관계를 인식하면서도 이를 넘어선다는 점에서만 미감과 구별된다."라고 하였다.

숭고는 대상의 이념을 어떠한 갈등 없이 관조하는 미적 체험과는 다르게 대상의 규모와 위압에 맞서는 저항과 투쟁의 정신적 작용을 거치며 이를 극복하는 데서 비롯되는 감정이다. 즉 숭고는 앞서 쇼펜하우어가 언급한 대상과의 적대적 관계로 인해 이념의 관조가 저항에 부딪히는 상황에서 대상의 위압을 극복하고 이에 다다르는 주관의 정신적 갈등이 동반되는 감정이다. 숭고의 체험이 갈등과 고통, 위협과 공포의 부정적 감정을 동반하는 복합적인 미감이라는 것은 버크 이후 칸트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관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 숭고를 미와 구분되는 미적 체험으로 특징짓는 본질적인 차이라는 면에서도 그렇다. 따라서 숭고는 대상과의 적대 관계가 주어지는 환경에서 자극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폭풍우의 움직임에 휘말린 자연과 같은 환경에서 우리의 의존성과 적대적인 자연과 치르는 우리의 전투는 직관적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열악하고 잔인한 자연의 환경 속에서 꺾이는 우리의 의지가 지금 우리 눈앞에 직관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물론 여기에서 쇼펜하우어가 숭고의 예로 든 환경은 이전의 미학에서 다루었던 숭고의 예들에 해당하는 거대한 규모 또는 위협이 되는 자연 현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기존의 숭고 개념의 대상 속성의 조건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는 대상을 마주하는 주관과의 관계가 적대적이므로 공포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인식 주관의 저항과 투쟁 의식의 고취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주관이 맞닥뜨리게 되는 인식의 한계 상황의 두 가지 조건으로 칸트가 제시한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의 개념을 수용한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숭고의 체험을 가늠할 수 없는 무한한 크기의 대상 앞에서 인식 주관이 스스로의 한계와 무력함에 직면하게 되는 데서 비롯되는 체념의 감정과 스스로를 미약하게 인식하는 체험으로 설명하는 점에서 다른 차이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