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숭고는 비극에서도 나타날까?

k지니 2021. 7. 8. 07:52

쇼펜하우어는 개체로서의 주관이 스스로 부정되는 무(無)로서의 자기 인식을 통과한다는 점을 숭고 감정의 본질로서 강조한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이러한 체념의 주관, 무로서 축소되는 주관의 의미는 특히, 숭고 개념에 있어 다른 철학자들과 구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로서의 경험은 단지 적대적 대상에 대한 무력감, 좌절감에 머무르는 부정적 감정이 아닌, 세계를 의지의 객관화로써 인식하는 형이상학적 자각으로서 정신적 고양에 이르는 상태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미와 숭고는 모두 의지에서 벗어나 이념을 관조하는 순수인식주관으로부터 얻어지는 감정이다. 다만 아름다움은 대상에 대한 미적 관조 속에서 이념을 조망할 수 있게 됨으로써 주관의 개체성을 벗어나는 순수한 인식 작용의 상태에서의 고요함과 만족이라면, 숭고는 인식 주관이 감당하기 어려운 무한한 크기 또는 위력적인 힘 앞에서 개체로서의 주관이 대상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의지의 현상 속에서 스스로를 미약하고 무로서 느끼는 자기부정으로서의 의지 부정에 이른다는 점에서 다르다. 즉 숭고는 아름다움과 달리 고요한 만족이 아닌 저항과 투쟁에 의해 만족에 이르는, 칸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부정의 쾌라는 면에서 미와는 다른 감정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숭고는 주관을 형이상학적 고양의 상태로 이끄는 강렬한 감정이며 예술을 통해서 이러한 숭고의 감정에 이를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개별 장르 예술에 대한 논의에서 의지의 지배에 놓인 삶의 투쟁과 고통의 모사라는 실존적 의미를 부각하는데, 특히 비극은 쇼펜하우어가 고통을 초극하는 숭고의 감정과 관련하여 이러한 삶의 이념을 드러내기에 적합하고 중요한 예술 장르로서 다루었다. 쇼펜하우어에게 비극(Trauerspiel)은 시문학의 최고로 칭송될 만큼 의미 있는 예술로 취급되는데, 그 이유는 비극이 우리로 하여금 삶이 의지에 종속되어 있으며 삶에서의 투쟁을 의지가 객관화된 개체 간의 다툼, 즉 의지 스스로의 자기 파괴라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고통으로서의 삶의 본질을 직면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인류의 고통과 비애, 악의의 승리, 우연의 경멸적인 지배, 정의롭고 죄 없는 사람들의 절망적 파국이 우리 눈앞에 전개된다. 의지의 객관성의 최고 단계인 여기(인류의 삶)에서 의지의 자기 자신과의 충돌이 가장 완벽하게 전개되고 끔찍하게 나타난다. 그 의지의 현상이 자기 자신과 싸워 자신을 갈기갈기 찢는 것은 동일한 의지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비극의 심오함은 우리와 같은 개체들의 고통을 대면하게 하고 삶에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사건들의 개연성을 보여줌으로써, 단지 개별자의 고통이 아닌 삶의 고통에 대한 보편적인 묘사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또 한편으로는 고통을 비껴가는 삶의 묘사로서의 희극과 비교함으로써 비극의 진실성이 강조된다. 쇼펜하우어는 삶의 비극적인 고통이 희극에 의해서는 희석될 수 없다고 말하는데, 희극이 비극적인 세계관에 대해 반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대안으로써 또는 비극적 세계관을 교화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의 역할은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희극이 의지로서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오히려 삶의 본모습을 위장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더 큰 절망을 안기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희극은 피상적으론 마치 세계가 조화로운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키지만 의지에 얽힌 고통의 심연을 단순히 은폐할 뿐이다. 따라서 비극만이 인간이 겪는 고통의 본래 모습과 고통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담아낼 수 있으며, 이를 감상자에게 전달하고 깨닫게 한다. 쇼펜하우어가 희극을 예술로서 부정한 것은 아니다. 비극과 희극이 모두 인간 실존에 상응하는 드라마이며, 둘의 종합이 현실의 총체성을 온전한 모습으로 드러낼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비극이 개체화된 의지의 투쟁으로 인한 고통이라는 삶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는 온전한 장르이며 희극은 그렇지 못하다는 면에서 예술로서의 가치가 낮은 문학으로 평가한다.

쇼펜하우어는 비극에서 초래되는 인간의 불행이 어떤 모습이어야 의지의 자기 파괴로서 삶의 고통을 더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인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비극에서 묘사할 수 있는 불행의 동기는 세 가지인데, 첫째 어느 인물의 이례적인 악의로부터 초래된 불행, 둘째 우연과 오류에 의해 비롯되는 맹목적인 운명으로서의 불행,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의 각자의 단순한 입장의 반목을 통해 초래되는 불행이 그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 세 가지 불행의 형태 중 마지막 것이 가장 비극에 적합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불행을 하나의 예외로서 또는 우연으로서가 아닌 "인간의 행위와 성격으로 인해 쉽게 저절로, 거의 본질적으로 생기는 것으로 보여 주고,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끔찍할 정도로 가까이서 우리가 불행을 접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즉 비극에서 드러난 불행이 개체들 간의 의욕이 필연적으로 부딪치는 투쟁으로부터 기인하는 데서 삶의 고통의 보편성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 감상자로 하여금 비극의 개연성에 동참하게 하여 삶의 무상함을 자각하게 한다. 다시 말해 의지의 자기 파괴가 보다 잘 드러난 불행이어야 하며, 그것이 세 번째 등장인물의 입장에서 야기되는 갈등에 의한 불행이다. 요컨대,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개체화된 발현에서 삶에서의 고통의 본질적인 뿌리를 보았고, 이를 가장 심오하게 재현할 수 있는 표현 형식으로 비극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