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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에 나타나는 숭고의 모습

k지니 2021. 7. 9. 07:48

비극에서 숭고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우선 비극은 개체를 고통에 처하게 하는 적대적인 상황이 주어진다는 면에서,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투쟁의 과정에서 체념 또는 자기부정에 이르게 된다는 면에서 숭고의 이념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예술작품이다. 비극에서의 영웅적 생애는 바로 고통의 대면과 극복과정에서 종국에 자기 체념에 이르러 고통으로서의 삶을 관조하고 의지 부정에 도달하는 삶을 가리키며, 이를 숭고한 삶, 숭고한 인간인 영웅이라 칭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소품과 부록'에서 "행복한 삶이란 불가능하다. 인간이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인생행로는 영웅적인 인생행로다."라고 말하는데, 비극에서의 주인공은 바로 이러한 '영웅적 인생'을 보여준다. 비극에서 삶은 고통으로 드러나고 주인공은 이러한 삶에 맞서 투쟁하지만 결국 체념에 이르고 삶을 관조하는 인식에 도달하는데, 쇼펜하우어에게는 이러한 주인공의 투쟁과 체념이 최고의 삶으로서 '영웅적'이라고 칭송한다. 그리고 영웅적 인생을 표현한 예술작품인 비극은 숭고하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영웅적 인생 즉 숭고한 삶을 드러낸 비극의 인물로서 '파우스트'의 '그레트헨'또는 '햄릿'의 주인공을 예로 든다. 이들은 모두 그들 앞에 놓인 삶의 고통 앞에서 체념으로 귀결되는 삶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체념은 의지의 자기부정의 표현들이다. "그들은 모두 고뇌에 의해 정화되어, 즉 살려는 의지가 먼저 그들 마음속에서 소멸해 버린 후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을 자살에 대한 종용이나 죽음을 통한 구원을 칭송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들의 죽음은 극에서의 인물을 통해 삶의 비극성을 드러내기 위한 이야기 플롯으로서의 결말에 불과하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살려는 의지가 먼저 그들 마음속에서 소멸'한다는 의지 부정으로서의 체념의 순간이다.

이러한 비극적 삶을 표현한 예술은 감상자로 하여금 숭고의 감정을 자극하여 의욕하는 마음의 정화의 순간에 머무르도록 하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는 '카타르시스'개념과 유사한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으로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실현한다. 연민과 공포의 감정이 일어날 수 있는 극 중 원리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상자와의 유사성과 부당한 불행을 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연민의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을 당하는 사람을 볼 때 느끼고, 공포의 감정은 우리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때 느낀다. 그것(주인공의 운명)은 비행 때문이어서는 안 되고 중대한 과실(hamartia) 때문이어야 한다."라고 했다. 즉 비극은 우리와 유사한 상황에 놓인 인물이 과오로 인해 불행에 빠지는 이야기이며, 이를 통해 감상자는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측면에서 공포가, 악의 없는 불행이라는 측면에서 연민의 감정을 겪는다. 연민과 공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카타르시스와 함께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세 가지 개념으로서, 레싱 이래로 'Mitleid(연민)'와 'Furcht(공포)'로 주로 번역됐으나, 연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eleos'는 탄식을 토하게 하는 슬픔으로서의 '비탄(Jammer)'으로, 공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phobos'는 머리털이 곤두서고 소름이 돋게 하는 체험으로서의 '전율(Schauder)'로 번역하여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문헌 학계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견해다. 또한 레싱이 시학의 번역어로 선택한 독일어 'Mitleid'는 쇼펜하우어가 윤리학에서 말하는 타인을 나와 같은 의지의 존재로 보는 데서 오는 동정, 연민의 마음과는 무관한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은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비극이 일깨워주는 자각, 즉 이 모든 고통이 개체로서의 인물 각자의 입장으로 인해 벌어지는 갈등과 충돌이라는 삶의 본질에 대한 인식과도 같으며, 바로 이러한 자각에 비극의 역할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가져온 효과로 고통으로부터의 감정의 정화, 즉 카타르시스(katharsis)를 말하는데, 이는 의지의 진정제로써 예술의 역할을 강조하는 쇼펜하우어의 견해와 유사한 맥락을 지닌다. 카타르시스에 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세한 설명이나 정의를 하지 않아 어떤 원리에서 산출되는 감정인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카타르시스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감정의 정화'를 의미하는 윤리적인 견해와 '감정의 배설'을 의미한다는 의학적 견해로 나뉜다. 카타르시스 체험은 실존의 극한적 한계 앞에서 터져 나오는 연민과 공포 그리고 이를 통해 고통에서 희열로, 현실의 부정성에서 초월적 긍정에로 나아가는, 인간 본질에 대한 이중적 체험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비극의 숭고 체험, 즉 삶의 고통 앞에서 자기 체념과 자기부정을 통과함으로써 의욕에서 벗어나 삶의 관조에 이르게 되는 흐름과 다르지 않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공포에서 희열, 부정에서 긍정으로의 감정적 변화를 의미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단지 부정에서 긍정으로의 감정 변화가 아닌, 이 모든 것이 의지의 발현과 자기 파괴에 불과하다는 인간과 삶의 근원에 대한 자각과 체념에 이른다는 점에서 비극을 통해 얻는 궁극적인 지평이 구분된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예술 장르 중에서 비극이 그의 염세주의적 세계관을 가장 적극적으로 보여준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개인들은 그들의 성격과 이해관계들에 의해 불가피하게 충돌하고 예측 가능한 갈등에 봉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등적 삶의 비극은 감상자들에게 스스로의 삶의 본 모습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는 거울 속에 붙잡아 둠으로써 삶으로부터, 의지에서 벗어나는 탈 세속을 자극한다. 그리고 이러한 탈 세속의 자극이 바로 의지 부정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