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음악적 형이상학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 체계 내에서 음악은 의지의 한 양상이자 의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개현이며, 따라서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음악의 행위는 삶의 본질로서 의지에 다가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음악에 몰입해 들어간다는 일상적인 표현은, 주관이 음악을 '하는' 행위가 아니라 음악에 의해 주관의 사유, 즉 이성적 분별과 개념의 장벽인 표상 세계가 허물어지고 의지의 세계로서 음악만이 남는다는 말과도 같다. 쇼펜하우어는 이와 같은 음악의 형이상학적 체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음악은 이념을 고려하지 않는 까닭에 현상하는 세계와도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그 세계를 단적으로 무시하며 세계가 아예 없어진다 해도 어느 정도는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표현했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에 관한 논의에서 미와 숭고를 구분하여 다루지는 않았지만, 여기에서는 쇼펜하우어가 음악의 형식과 의지의 유비를 다룬 부분을 참고하여 음악에서의 숭고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숭고는 삶의 고통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과 이를 통해 드러나는 고양의 감정이다. 음악은 선율과 화성의 흐름을 통해 이러한 삶의 투쟁과 고통을 드러내는데, 가령 "아다지오는 단조에서 가장 커다란 고통을 표현하여, 아주 크게 마음을 뒤흔드는 비탄으로 된다.", "가능한 선율이 무진장 많은 것은 자연에서 개체의 용모와 생애의 차이가 무진장한 것과 상응한다.", "연관이 완전히 끊어진 다른 음조로 넘어가는 것은 개체가 끝나는 죽음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개체에 나타났던 의지는 이전 개체의 의식과 아무 연관 없는 의식을 지닌 다른 개체에 나타나면서 여전히 살고 있다. 같은 표현이 그러하다.
이러한 음의 전개는 인간의 겪는 삶의 높고 낮은 격랑과 기쁨과 슬픔의 끊임없는 교차, 불안과 안도, 환희와 추락의 삶의 보편적인 흐름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비극에서 삶의 고통을 대면하는 순간과 비유될 수 있다. 인간의 삶과 음악의 이러한 연관에 대해 플라톤은 음악을 "영혼의 감동을 모방하는 선율의 운동"으로,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한 음에 불과한 리듬과 선율이 어째서 영혼의 상태와 비슷한가?"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음악을 아름답고 조화되어 있는 상태로 느끼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음의 완전히 순수한 화성 체계는 물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이미 산술적으로도 불가능하다"라는 점을 강조하며 "완전히 옳은 음악은 생각조차 할 수 없으며, 하물며 그런 음악을 완성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겉으로 드러난 음악의 조화로움조차도 사실은 "본질적인 불협화음을 모든 음에 분할함으로써 평균율에 의해 은폐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음악은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이며, 불안하고 위태로운 의지의 분출에 직접적으로 맞닿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 또한 비극과 마찬가지로 투쟁과 갈등의 삶의 근원을 의지로써 체험하게 하며 그러한 선율과 리듬이 우리의 감정을 뒤흔들게 하여 영혼의 고양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숭고의 감정을 자극한다. 음악은 궁극적으로 고통의 현실에 내던져진 인간을 위한 생의 위안이자 진정제라는 의미에서 실존론적인 의의를 가진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에 대해서는 순전히 격정, 의지의 움직임이 현존하고, 자신의 본질적인 아름다움, 순수함 그리고 숭고함을 유지하고, 인간의 삶의 익살극과 끝없는 불행 위에 우리 현존의 깊고 진중한 의미가 걸린 채, 인간의 삶을 잠시도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음악을 개체의 개별적 고통과 슬픔이 아닌, 고통 그 자체, 슬픔 그 자체를 드러내고, 고통의 본질을 직관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면에서 보편의 예술이자 숭고의 예술이라 보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