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운동체 궤적의 역설의 이해
제논의 화살의 역설에서 말하는 시간은 운동체의 궤적의 특정 순간들의 집합일 뿐, 생성하는 시간이 아니다. 제논의 역설은 시간을 공간화함으로써, 즉 시간을 공간처럼 분할 가능한 것처럼 전제하고, 시간상의 운동을 운동체의 공간상의 궤적으로 환원함으로써 가능하게 된 것이다. 화살이 날아가는 동안에 어느 특정 순간에, 특정 지점에 있지 않겠냐는 생각은 이러한 환원의 오류에 속한다. 이는 단지 흐르는 시간 속의 운동에서 우리의 이성이 정지점으로 떼어낸 것을 사후적으로 재구성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불가분의 흐르는 시간 자체가 아니다. 정지는 아무리 모아도 흐름이 되지 않는다. 이성에 의해 자의적으로 분절하고 재구성해서 이어 붙일 수 있는 공간 개념을 시간과 운동에 적용한 것이 `시간의 공간화`이다.
여기서 `시간의 공간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공간적 사유의 기본특성을 언급하고 공간 개념이 운동과 시간에 침투한 방식을 논할 필요가 있다. 공간의 기본적 특성은 동질성과 동시성이다. 베르그송은 우리의 지성적 사유의 재료가 공간임을 논증한다. 특히 수와 수를 세는 단위가 공간 개념에서 유래함을 밝힌다.
수를 세기 위해서는 공간 속에서 구별이 있는 장소를 점하는 동질적 단위로 표상해야 한다. 각 공간을 점유하는 물질의 단위들은 불상입(不相入)하고 동질적이며 상호 독립적 실체이다. 서로의 공간을 침입하지 못하고 공간상의 다른 장소에 있어야 한다. 10마리의 고양이를 센다고 할 때 각각의 고양이의 개별적 특성은 무시되고 동질적인 하나의 단위로 취급된다. 또한 고양이들은 서로 공간적으로 구분되고 격절되어야 비로소 헤아릴 수 있다. 이렇게 수의 개념은 공간 개념을 내포하고 있으며 공간과 수의 개념은 다 같이 가분성, 동질성, 병렬성, 불연속성, 상호 외재성(=不相入) 등을 공유한다. 또한 흐르는 시간에 공간 개념이 침투하면 시간도 동질적이 된다. 동질적 시간은 동시적이다. 요컨대 공간 속에 시간을 투영하여, 흐르는 시간을 공간상의 길이로 표상하기 때문에 시간의 연속을 마치 연속된 선이나 사슬의 형태처럼 여겨 각 부분들이 상호 침투하지 않고 서로 인접해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런 이미지는 시간을 연속적 흐름[繼起]이 아니라 동시적 선후의 지각을 갖게 한다. 시간은 선분 상의 점으로 환원되고 그 점들은 공간에서 전후좌우로 병치되어 동시적으로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시계를 본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병렬된 눈금 위를 지나는 시곗바늘의 궤적을 세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공간개념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연속적 흐름으로서의 시간을 `지속(duree)`이라 불렀고 이를 그의 생성론적 사유의 기초로 삼았다. 그는 지속이야말로 참된 실재라고 여겼다. 실재로서의 시간은 공간 개념이 전혀 개입되지 않으며 불변의 실체를 전제로 하는 실체론적 사유를 포기함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변화 그 자체에 침투해야 한다. 변화의 흐름 자체로서의 지속의 좋은 예가 멜로디이다. 멜로디는 우리의 내적 생성의 유동성에 가장 흡사하다. 멜로디는 많은 질을 가지면서도 음 자체의 구별된 여러 성격을 없앤다. 흐르는 음들은 질적으로 다양하지만 분할되지 않고 분리 없이 계속될 때 의미 있게 된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의 첫 음을 "빰빰빰빠~"라고 연속되게 연주해야 우리가 아는 그 음이 되는 것이지 "빰빰", 띄우고 "빰빠~"라고 하면 전혀 다른 음이 된다. 운동과 변화는 고유한 자신의 리듬을 가지고 진행된다. 운동이 불가분적이라고 하는 뜻은 운동을 전혀 분할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누게 되면 전혀 다른 운동이 된다는 의미이다.
베르그송이 제논의 부동의 역설을 논파하고 그 속에 감추어진 공간적 사유를 폭로한 것은 단순히 사물에 운동성을 도입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베르그송이 아니어도 세계의 현실적 변화와 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노력은 있어왔다. 일례로 플라톤은 그의 후기의 저서 『소피스트』에서 비존재(無)의 존재를 입증함으로써 파르메니데스의 "비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는 명제를 반박하고 부동의 일자에 다자성과 변화가 가능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