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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성과 공간성의 분리와 추상화

k지니 2021. 7. 30. 08:14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 생성한다. 그러나 언어는 연기적으로 생성하는 살아있는 사태의 변화를 고정화 실체화시킨다. 존 록크(John Locke)는 『인간오성론』에서 일반 어휘(general words)가 특정 사물에서 시간성과 공간성을 분리시켜 추상화하고 고정화해 놓은 것임을 이미 논증하였다. 그는 어휘는 일반 관념의 기호로 만들어질 때 비로소 일반적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관념은 그 관념으로부터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과 분리시키고 그 관념을 이것이나 저것이라는 특수한 존재에게로 국한시키는 모든 관념을 떼어내 버릴 때 비로소 일반적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추상의 방법에 의하여 그 관념들은 하나 이상의 개체들을 표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추상적 관념을 나타내는 말들은 모두 이런 종류의 것들이다. 일례로 눈앞에 현재 하는 사태로서의 '꽃'은 시간 속에 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오직 변화와 시간 속에서 꽃은 하나의 과정적 사태로서 그것은 마치 존재하는 듯하다.

그러나 '꽃'이라는 언어의 옷을 입고 개념화한 꽃은 변화하지 않는다. 시간과 변화 속에서도 '꽃'은 여전히 '꽃'이다. 개념은 부단히 변화하는 사물을 언어 속에 고정시킨다. 개념 속에 들어온 사물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동일성으로서의 꽃은 시들지 않는다. 일상언어에서 우리는 "꽃이(S) 핀다(V)."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쓴다. 그런데 이 말은 꽃이 이미 선재해 있고, 있는 꽃이 핀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후적 인식의 전도가 숨어있다. 꽃은 '핀다'라는 동사적 사태 이전에는 꽃일 수 없다. 꽃은 '핀다'라는 동적 과정 그 자체 속에 있는 것이지 어떤 객관적 대상으로 선재하고, 그 선재하는 꽃이 다시 피는 것이 아니다. 이는 "봄이 온다"라거나 "바람이 분다"라는 주어의 실체성이 흐릿한 명사에서 더욱 분명하다.

'봄'이라는 독자적 계절이 어디 별개의 장소에 있다가 오는 것이 아니다. 얼음이 녹고 아지랑이 피는 현상의 변화 그 자체를 언어적으로 고착시키고 명사화한 것이 '봄'이라는 언어이다. 불지 않는 '바람'이 어디 따로 있을 수는 없다. 단지 우리의 언어의 분절적이고 고정화의 기능에 의해서 그 실체적 주어를 술어와 연결시켜 세계를 재구성한 것이다. 생성과 시간을 객관적 대상처럼 고정시키는 사유의 기원은 언어습관을 반성하지 않음으로써 생긴 것이다. 언어에 의해 사후적으로 재구성된 인식 때문에 본체-현상, 실체-속성의 이분적 틀로 세계를 파악하게 된다.

또한 '꽃이 핀다'고 할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꽃'이 아니다. '바람이 분다'라고 할 때도 바람을 직접 경험하지 않는다. 직접적 경험의 사태는 '핀다' 라는 동사적 사태이며 '분다'라고 하는 피부에 체감되고 감각에 직접 수용되는 어떤 변화에 대한 경험이다. 이러한 생성의 사태를 경험에서 추상하여 별개의 것으로 떼어내고 고정시킨 가설적 개념이 '꽃', '바람'이라는 명사이다. 언어는 우리의 경험을 소통하고 전달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지 실재 그 자체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언어의 한계가 있다. 불교에서 개구즉착(開口卽錯; 입 벌리면 곧 착오를 일으킨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언어 불신의 경고를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주어-술어의 언어구조가 실체-속성의 세계해석을 일으키는 오류에 대한 경고는 용수(龍樹, Nagarjuna)의 『중론』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례로 운동부 정의 논리로 알려진 제2장 「관거래품(觀去來品)」을 들 수 있다. 『중론』의 많은 논증이 「관거래품」에서 확립한 부정 논증에 근거해서 차후 논리를 진행하는 것을 볼 때 이 품의 논증이 공(空) 사상의 이해에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제2장 「관거래품」의 제1송은 "이미 가버린 것은 가지 않는다. 아직 가지 않은 것도 가지 않는다.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나서 지금 가고 있는 것도 가지 않는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미 가버린 것[已去]'은 과거의 것이므로 가는 작용이 멈추었기 때문에 가지 않는다고 이해할 수 있다. 가는 작용이 멈춘 사물은 가는 작용이 있을 수 없다. '이미 핀 꽃이 (다시) 핀다'는 것은 일상 언어감각으로도 이상하게 들린다. 그러므로 '이미 가버린 것이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아직 가지 않은 것[未去]'이란 아직 가는 작용이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것이므로 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피지 않은 꽃이 핀다.'라고 하면 상식적인 표현으로 일상언어에서 쓰일 법하다. 그러나 어떤 사물(주어)이 작용(술어)과 결합하려면 최소한 완전히 별개의 것일 수는 없다. '아직 피지 않은 (꽃)'이란 '핀다'와는 무관한 사태이다. 주어는 작용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고 술어는 작용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돌맹이'와 '핀다'가 서로 무관한 사태인 것과 같다. '아직 피지 않은 꽃' 예를 들어 꽃봉오리라 해도 '핌'이라는 작용과 아직은 무관하기 때문에 '아직 피지 않은 꽃이 핀다'고 하면 불합리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가버린 것[已去]'과 '아직 가지 않은 것[未去]'이 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지금 가고 있는 것[去時]'이 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