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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부정과 시간 흐름의 관계

k지니 2021. 7. 31. 08:21

반대론자는 제2송에서 묻는다. "운동이 있는 곳에는 가는 작용이 있다. 운동이 있는 중에는 이미 가버린 것도 아니고, 아직 가지 않는 것도 아닌, 지금 가고 있는 것이 간다. 그러므로 지금 가고 있는 것에는 가는 작용이 있다."라고 하였다. 반론자의 '지금 가고 있는 것이 간다'라는 말은 예를 들어 과거의 꽃과 미래의 꽃은 핀다고 할 수 없지만 '지금 피고 있는 꽃은 핀다'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운동에 있어서 과거, 현재, 미래 중에 적어도 현재의 진행 중인 운동은 부정할 수 없다는 반박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피고 있는 꽃이 핀다'고 할 때 여기에는 두 개의 '핌(작용)'이 있다는 불합리를 용수는 지적한다. "지금 가고 있는 것이 간다고 하면 두 개의 가는 작용이 있다는 오류에 귀착한다. 첫째는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去時]이고 둘째는 그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의 감[去時去]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두 개의 가는 작용이라 하면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去時]"에 있는 '감[去]'이 하나요, 그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이 간다[去時去]" 할 때의 '감[去]'이 또 하나이다. 즉 주어 개념 속에 들어있는 '감'과 술어 개념 속에 있는 '감'이다. 표면상으로 용수는 '옥상(上) 위', '역전(前) 앞'이라고 할 때 우리가 흔히 하는 말실수인 불필요한 중복(redundancy)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지금 피고 있는 꽃이 핀다'를 그냥 '꽃이 핀다'로 바꾸어 중복을 없앴다고 해서 오류가 치유되는 문제는 아니다. '꽃이 핀다' 할 때 주어인 은 '핀다'라고 하는 동사적 사태와 무관한 꽃이 아니라, 바로 그 피어나는 동사적 사태에서부터 현출 된 것이기 때문에 '피고 있는 꽃'인 것이다. 명사 주어에 이미 동사적 사태가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피고 있는 꽃이 핀다'라는 명제로 귀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불합리는 우리가 주어-술어 구조로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 피할 수 없는 불합리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역동적 세계가 우리 경험에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방식은 '핀다' 혹은 '분다'와 같은 동사적 혹은 술어적 사태이다. 그러나 주어로서 대상을 실체화하지 않으면 언어는 소통 불가능하다. 이런 불가피한 주어-술어적인 언어습관이 무반성적으로 실재에 덧입혀지게 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역동적 세계의 변화와 생성은 실체로서 고정화되고 그 실체들은 다시 엮어져서 재구성된다. 마치 실체가 존재성을 선점하고 거기에 속성이 부가되며, 주체에 작용이 덧붙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주어+술어로 구성된 운동은 본래의 역동성 자체인 운동이 아니라 사이비(似而非: 비슷하지만 아니다.) 운동이 되는 것이다. 언어로 가설된 그림자가 생성의 실재를 밀어내고 주인행세를 하는 전도가 일어난 것이다. 인간의 언어, 즉 주어-술어적 언어구조가 앞서 분석한 '영화적 착각'이 일어나는 최종 근거가 된다. 동사적 실재가 실재에서 분절된 고정된 명사적 파편을 이어 붙임으로써 재구성 가능하다고 하는 그 착각은 바로 우리의 언어구조에 기인한다. "관거래품"에서 논증하려는 운동의 부정은 무실체적 연기 생성으로서의 운동(역동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주어-술어적 사이비 운동을 부정한 것이다.

사이비 운동이 부정되면 그 주체도 부정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관거래품"의 7게송부터는 주체와 작용을 모두 부정하고 12게송부터는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의 흐름을 부정하고 있다. 이때의 시간의 흐름도 동일한 논리로 사이비 흐름인 것이다. 12게송에는 "과거 시간의 흐름도 없고, 미래시간의 흐름도 없고, 현재시간의 흐름도 없다. 어디에도 시작은 없는데 어떻게 시간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라고 표현되어 있다. 용수는 시간의 시작과 끝을 모두 부정[無始無終]하고 시간의 흐름조차 부정하고 있다. '꽃이 핀다', '바람이 분다'가 성립 불가능하듯이 '시간이 흐른다'도 불가능하다. 중층적 조건들의 무한한 얽힘과 역동적인 연기 생성의 흐름 그 자체인 시간을 인식과 개념의 표상 작용으로 고착시키고 분별된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시간을 분절하고 박제화하는 것이다. 박제된 시간은 아무리 공간적 연속성속에 재배열한다고 해도 그것은 살아있는 시간이 되지 않는다. 공사상은 이런 생성의 실체화를 근원적으로 거부하는 사유이다.

공사상이 일체를 부정하는 논리를 전개하지만 그것은 부정을 위한 부정도 아니고, 허무로 귀착하는 부정도 아니다. 그것은 실체적 사유의 불합리를 고발하여(破邪) 실재세계의 연기 생성을 드러내는(顯正) 작업이다. 중론이 철저한 부정의 논리로 일관하는 것은 언어와 개념의 실체적 표상으로 포착할 수 없는 유동하는 연기적 실재(달)를 가리키는 언어(손가락)이기 때문이다. 실체적 사유의 부정의 이면에는 무실체적 생성의 긍정이 있다. 중국화 된 불교의 특색의 하나는 이런 긍정성으로의 전환이다. 절대 부정[一切皆空]의 사유에서 절대긍정[一切皆眞]의 사유로 전환으로서 중국 불교의 특색을 평가한다면 승조는 그 전환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