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생성성에 의한 회일

k지니 2021. 8. 10. 09:22

「물불천론」에는 운동부정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대승의 경론뿐 아니라 당시 소승으로 치부되던 성문연각, 위진시대의 주류적 사상인 노장과 공자의 사상까지 핵심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이는 그의 불천(不遷)의 주장이 불, 도, 유(佛道儒) 삼가의 사상을 회통하려는데 있음을 함축한다. 중국 사상사의 삼가 회통의 전통도 승조에게서 기원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승조는 이것을 생성 일원적 세계관의 기초에서 회일(會一)하려고 한다.

만일 승조의 불천의 의도가 불변하는 본체적 세계관을 전제한 것이라면 초기불교 이래의 여러 학파의 무상(無常)의 교설과는 모순되며 이를 포괄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게 된다. 그래서 먼저 불천의 논리가 성문연각(聲問緣覺)의 무상의 깨달음과 회통 가능한지 승조 스스로 묻는다. "사람 목숨이 빠르게 지나가니 시냇물보다 신속하다. 그러므로 성문은 무상[非常]을 깨달아 성도하고, 연각은 맺고 흩어짐을 깨달아 진리에 나간다. 만일 만물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성문연각이) 어떻게 변화를 탐구함으로써 도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성인의 말씀을 자세히 탐구해보니 은미하고 헤아리기 어렵다. 움직이는 것 같으나 정지하고, 가는 것 같으나 머문다."

승조의 '불천(不遷)'의 주장을 문자 그대로 '정지'의 의미인 운동의 부정으로 형식논리적으로 이해한다면 다른 교학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여기서 승조는 "움직이는 것 같으나 정지하고, 가는 것 같으나 머문다[若動而靜, 似去而留]"는 동정상즉(動靜相卽)의 중도적 표현을 통해서 성문연각의 무상과 연기법의 이해를 포괄하는 회통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승조는 이러한 동즉정(動卽靜), 정즉동(靜卽動)의 입장을 통해서 상주와 단멸의 양변의 주장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흘러감을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흘러가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상주의 망상[常想]을 막기 위함이며, 머뭄을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머무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바 (단멸적) 흘러감을 버리게 하기 위함일 뿐이다." 생성성(生成性)의 입장에서는 생성자의 동(動)과 정(靜)이 부정된다. 즉 생성자의 상주적 정(靜)도, 단멸적 동(動)도 모두 부정되어 동정상즉(動靜相卽)이면서 또한 비동비정(非動非靜)의 논리가 세워진다. 이는 연기적 생성에 의거한 비유비무(非有非無) 논리가 상주 단멸을 지양(止揚)한 것과도 상통한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운동과 정지, 오고 감이 언어상의 표현에서 서로 모순되는 듯하지만 결국 하나로 회통한다[兩言一會]고 하였다. 이제 승조는 성문연각의 제행무상의 주장, 대승경의 제법부동의 주장, 나아가 움직임과 정지가 동일하다는 이율배반적 주장을 회통하는 근거로서 "하나의 이치[其致一也]"가 제시되어야 할 당위성에 직면한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지금까지 그것은 운동을 실체적 사물에 술어적으로 부가된 것으로 파악하는 실체-속성적 사유를 배제하고, 세계를 순수한 운동과 흐름 그 자체로 파악하는 생성적 일원론의 입장을 전제했을 때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을 보이려 하였다. 연기적 생성의 세계관을 토대로 해야 운동 그 자체가 정지가 되는 중도적 논리가 설립될 수 있다.

승조는 생성에 의한 회일(會一)의 입장을 가지고 불교 내의 상호모순된 교설을 포섭할 뿐 아니라, 유교와 노장라는 위진 현학 시대의 지적 주류의 담론까지도 포괄하고자 한다. 그의 회통적 시각은 다음 언급에서 드러난다. "여러 경전에서 글이 다르고 백가가 설명을 달리해도 만약 회일(會一)할 수 있다면 문장 표현이 다르다고 해서 어찌 미혹할 수 있겠는가?"

「물불천론」에서 하나의 이치[致一], 혹은 회일(會一)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승조가 적시한 것은 없다. 그러나 승조의 물불천의 주장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참조틀이 있다. 그것은 불교 외에 그의 정신세계의 또 다른 축이 되고 있는 노장(老莊)과 공자를 통해 드러난다. 「물불천론」이라는 1300자(字) 정도의 짧은 논문에서 노장과 공자의 인용이 다수 발견된다는 데서 승조사상에 대한 이들의 영향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