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조의 시간불천론
승조의 시간관은 「물불천론」에 나타난 운동부정의 논증의 연장선상에서 드러나며 그 표면적 논리는 시간의 흐름의 부정으로 표현된다. 승조의 운동부정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중론』 「관거래품」에 나타난 무실체적 관점을 계승한다. 따라서 그의 시간관에 있어서도 설일체유부의 삼세실유적 관점을 지양하고 용수의 무실체적 시간관을 계승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몇몇 연구자들은 승조의 시간관이 설일체유부의 관점을 수용하고 있고 주장한다.
시간이 과거로 흘러간다고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과거와 현재가 항상 그러하게 존재[古今常存]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다[不動]. 시간이 간다고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가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현재로부터 과거에 이르지 않기 때문에 미래로부터 오지 않는다[不來]. 미래로부터 오지 않기[不來] 때문에 과거나 현재로 달려가지[馳騁] 않으며 운동하지 않기[不動] 때문에 각자의 성품[性]이 하나의 시간대[一世]에 머문다. 표현 그대로 보면 '삼세가 실체로서 존재하고 법의 체성이 항상 존재한다(三世實有 法體恒有)'는 설과 다르지 않다.
앞의 문장은 앞에서 사물의 불래불거(不來不去)를 통한 운동부정의 논증의 결론으로 제시한 "과거사물은 그대로 과거에 있으므로 현재로부터 과거에 이르지 않았고(不去), 현재사물은 그대로 현재에 있으므로 과거로부터 현재로 온 것이 아니다.(不來)"를 시간의 흐름[動]의 관점에서 다시 한번 확인한 문장이다. 그러나 위 문장의 축자적 표현에 따른다면 승조가 세계를 질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생생한 인간경험을 배제하고 과거와 현재를 날카롭게 단절시켜 어떤 접합점도 없는 실체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우선 고금상존(古今常存)에서 말하는 상(常)을 불변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속단할 필요는 없다. 중국의 생성일원적 고전철학에서 항구불변의 존재로서의 상(常)의 개념은 없다. 그것은 변화의 항상성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상도常道'는 '영원불변의 도'라고 풀이된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동양 사상에는 영원불변의 도란 없다. 영원불변의 도란 곧 서양의 본체 개념, 신 개념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순환 속의 영원'이란 말에서 보듯, 그리고 변화이 철학인 『주역』에서 말하는 변역變易과 불역不易에서 보듯 그것이 영원히 '도'로 있기 위해서는 항상 멈추지 않고 변해야 하는 것이다.
변화의 항상성은 생성의 지속이다. 따라서 고금상존(古今常存)은 '과거와 현재가 고립적인 실체로서 불변적으로 존재한다'고 번역될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변화의 흐름 속에서 항상하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생성적 세계관에서 시간은 분할불가능한 연속적 흐름이다. 이렇게 시간을 분할 불가능한 것을 보았을 때 과거, 현재, 미래라는 말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명확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연속적 흐름으로서의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분할하여 두고 이들 간의 관계를 '흐른다'라는 동사를 덧붙여 엮어낸 것이 아닐까? 마치 강물의 흐름을 상류와 중류, 하류로 분할하고 난 후 강의 흐름을 상류에서 중류, 하류로 흐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다.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상류, 하류로 나눌지조차 불분명하다. 운동부정에서 운동을 운동하지 않는 고정적 요소로 분할할 후에 가변적 속성을 부여함으로서 본래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부정한 것처럼 승조는 시간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분할한 뒤에 그 연속성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하는 시간의 흐름을 부정한다.
승조는 시간이 과거와 현재 사이를 '오지도 가지도 않는다[不來不去]'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과거에는 현재가 없고 현재에는 과거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과거의 사건은 그 자체로 과거를 직조하고 있고 현재의 사건은 그 자체로 현재를 직조하고 있다.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로 흐른다는 일반적 생각에는 사물의 동일성이라는 전제가 숨어있다. 물(物) 즉 사물-사건과 시간을 별개의 것으로 분리하여 그 위에 상태의 변화를 덧씌우는 방식으로 시간 속의 변화를 지각한다. 승조가 부정한 시간은 객관적 시간이다. 객관적 시간이란 동질적 단위로 분할하여 측정가능한 무한히 연속하는 시간이다. 요컨대 시계의 시간이다. 시간이 측정가능할 때 관찰자는 시간의 외부에 있는 자이며 시간의 직조와 별개의 존재자로서 시간을 대상화하게 된다. 강물을 상류와 중류 그리고 하류로 분할 할 수 있는 것은 관찰자가 흐름 밖의 고정성 위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