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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적 만족이란?

k지니 2021. 6. 26. 22:45

칸트는 순수 오성의 개념으로서 범주를 양(Quantitat), 질(Qualitat), 관계(Relation), 양태(Modealitat)의 네 가지의 계기에서 분석하는데 미적 판단에서도 동일하게 네 가지 계기를 적용하여 분석한다. 다만 미적 판단에서는 분석의 순서에서 오성 범주의 분석과는 다르게 양이 아닌 질을 제1계기로 한다. 이에 대해 칸트는 "미에 대한 미적 판단이 이 계기를 먼저 고려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미적 판단이 질적 계기를 먼저 고려하는 이유는 판단의 근거가 주관의 쾌, 불쾌의 감정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이 미적 판단이 논리에 근거한 일반적인 인식판단과 다른 가장 본질적인 차이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미적 판단이 오성의 논리적 범주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칸트는 "어떤 것이 미적인 것인가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표상을 오성에 의해 인식하기 위해 객관에 관계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오성과 결합한 상상력에 따른 주관 및 주관의 쾌 또는 불쾌의 감정과 관계시킨다"라고 말한다. 즉 미적 판단은 오성과 상상력이 결합된 판단이며, 표상에 대한 미적 판단에 있어 오성과 상상력의 조화 및 갈등에 따라 쾌와 불쾌의 감정과 그로 인한 미와 숭고의 차이가 발생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미적 판단에서는 판단하는 대상 자체의 사태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관찰 대상에 대한 주관의 주관적 상태(Befindlichkeit)가 작동한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쾌와 불쾌의 감정으로 나타나는 주관의 상태가 만족(Wohlgefallen)이다. 여기에서 칸트가 '쾌(Lust)'라는 단어는 현대의 심리학이나 의학에서 표현하는 의미와는 다르게 사용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오늘날 쾌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성적인 혹은 생리적인 쾌감의 의미로 통용되는데, 칸트는 미학적인 의미에서 관조적인 만족(Wohlgefallen)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독일어의 의미에서 보았을 때도 욕구, 결핍의 충족이라는 의미에서는 'Zufriedenheit'를 일반적으로 사용하지만 칸트가 사용한 'Wohlgefallen'은 두루 마음에 드는 상태 또는 관조적이고 반성적인 만족으로서 그 의미가 다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백종현은 Wohlgefallen을 '흡족'이라는 단어로 번역한다.

그런데 칸트는 대상에 대한 미적인 감상에 있어서의 만족에는 주관의 이해나 욕구에 따른 관심이 개입되어 있지 않아야 함을 강조한다. 칸트는 "취미판단을 규정하는 만족은 그 어떤 관심과도 무관하다"라고 단정하는데 여기에서 관심은 "우리가 대상의 현존(Existenz)의 표상과 결합되어 있는 만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관심과 무관하다는 것은 대상의 현존에 대해 주관이 어떠한 개별적인 이해와 욕구를 반영하여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가령 길을 가다 발견한 꽃에서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낄 때는 그 꽃을 꺾어 소유하거나 다른 장소에 두어 장식하고자 하는 유용성에 대한 이해를 그 꽃에 반영하지 않는 상태여야 하는 것이다. 즉 대상이 되는 꽃이 현존하는 방식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꽃을 관조함에 있어 나에게 불러일으켜 지는 순전한 만족감이 미적 판단의 상태라 할 수 있다. 반대로 관심이 개입하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미적 판단이 아니며 "매우 당파적이고 순수한 취미판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미적 판단에서의 만족이 바로 무관심적 만족이며 칸트는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 하는 물음이 있을 때, 사람들이 알고자 하는 것은 우리에게 또는 어느 누군가에게 그 사상의 실존이 어떤 중요성을 갖는가 또는 단지 어떤 중요성을 가질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순전히 바라봄에서 그것을 어떻게 판단하는가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무관심성은 미적 판단에 있어 제1의 질적 계기이며 대상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판단에 있어 전제가 되는 주관의 감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종의 욕망이나 지향점 또는 목적이나 그 어떤 사회적, 도덕적, 지적 고려사항들로부터 벗어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미적 판단을 위한 주관의 전제 조건이 되며, 오직 그러할 때에만 대상에 대한 나의 인식은 순수하며 관조적인 미적 만족에 다다를 수 있다.